지난 2월 21일, 마이크 허커비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가 성경에 나오는 '신의 약속'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중동 전역을 차지해도 괜찮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21세기에 종교 경전을 근거로 영토적 권리를 논하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이지만, 사실 국내에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옳고그름을 따지는 담론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이러한 종교적 동기가 실질적으로 고려된 적은 없다. 오히려 유대교 랍비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집단 이주와 유대 국가 건설에 반대했다. ( 2편 참조 ) 게다가 건국의 주역인 시온주의자들은 거의 전부 세속주의자였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인 유대인은 20%에 그친다. 그렇다면 시온주의자들은 대체 왜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을 건설했을까?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이 질문은 사실 초기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논쟁이 된 주제다. 최초의 시온주의 사상가인 모세 헤스는 1862년에 쓴 <로마와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유대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이는 정치적 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시온주의 사상을 실질적으로 창시했다고 평가받는 레온 핀스커는 1882년에 <자력해방>에서 유대 국가를 세울 장소로 북아메리카를 선호하고 팔레스타인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시온주의의 확산에 크게 공헌한 테오도르 헤르츨은 1896년 <유대 국가>에서 아르헨티나와 팔레스타인을 유력한 후보지로 제시했다. 이처럼 시온주의 초기에 팔레스타인은 유대 국가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않았다. 게다가 단점도 명확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이주시키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한 데다가 이미 수많은 아랍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왜 하필 팔레스타인이었을까 오늘날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까지 팔레스타인인들의 비극은 유럽의 민족주의에서부터 그 싹이 피어났다. 통념과는 달리 민족이라는 개념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고,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다. 17-18세기 유럽에서 기독교 중심적 공동체 개념을 대체해 국가 단위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처음 발명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후적으로 만든 공동체 개념이 정치·사회적 현실에 들어맞을 리 없었다. 한 국가 내에서도 상이한 특질을 지닌 집단들은 여럿 존재했다. 게다가 복수의 국가에 분포하고 문화적 특징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소수 집단들은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민족 개념이 태동했을 때 유대인들은 다른 유럽인과의 동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중세 동안 축적된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경제사회적 반감 등의 영향으로 많은 유럽인이 유대인을 같은 민족으로 인지하지 않고 차별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의 유대인 모세 헤스는 이러한 현상을 관측하며 유대인들에게 다른 유럽인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민족성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유럽 민족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유대인의 존재를 항상 이질적으로 여겨왔다. ... 계몽과 해방에도 불구하고, 민족성을 부인하고 (팔레스타인이 아닌)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은 거주지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절대로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Moses Hess, Rome and Jerusalem: a Study in Jewish Nationalism, trans. Meyer Waxman(New York: Bloch Publishing Company, 1918), 74. 따라서 헤스는 민족성과 관련이 깊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식민촌(colony)"을 건설하고 "유대 국가"를 "재건"함으로써 민족을 부흥시켜야만 반유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대 유대인들은 여전히 동화를 지향했고, 머지않아 반유대주의가 사라지리라 굳게 믿었다. 1881년, 동유럽에서 포그롬이라 불리는 유대인 박해가 일어나면서 동화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속적 지식인 사이에서 유대 민족을 만들자는 생각이 싹텄고, 이듬해 러시아의 유대인 레온 핀스커가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