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평행이론'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에 유사하게 재발한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여러 역사들이 있다. 이 가운데 수양대군(세조)과 전두환의 평행이론이 주목된다. 두 사람은 개인적 성품이나 역사 배경 등이 상당히 닮아있다. 이들을 통해 역사를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역사 지식을 효율적으로 습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정점이 될 수 없었던 수양과 전두환 애당초 수양은 권력의 정점에 올라올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수양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근본적으로 차기 대권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형이었던 문종이 워낙 뛰어나 감히 왕위를 넘볼 수도 없었다. 문종은 문무를 겸비했으며, 다방면에 통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종의 치세 마지막 7년 정도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세종 말기에는 문종이 대신 정사를 잘 돌보며 국가와 백성을 안정시켰다. 전분 6등, 연분 9등의 전세법 제정과 훈민정음 반포 등도 문종의 손길이 미친 치적들이었다. 이때 수양은 그저 가려진 존재에 불과했다. 전두환도 수양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점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비록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곤 하나, 일개 별 두 개짜리 소장에 불과했다. 전두환 위로 수많은 선배 군인들이 있었고,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여겨지는 유력 정치인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권력 구조 상, 전두환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정점의 위치에 올라설 수 없었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방법을 시행하게 된다. 갑작스레 발생한 권력 공백 조선은 세종 대에 이르러 반석 위에 올라섰다. 그를 빼닮은 문종이 즉위 하면서 조선은 더욱 발전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종은 오래 살지 못했다. 재위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 시절부터 괴롭혔던 등창이 악화된 탓이다.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즉위했지만, 너무 어렸고 정치적 기반도 취약했다. 나이가 12세에 불과했으며, 수렴청정을 할 대비도 없었다. 순식간에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틈타 수양이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낸 것이다. 박정희는 무려 18년 간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강력한 권력 기관을 지렛대로 삼아 오랫동안 집권하다 보니,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그가 1979년 10월에 갑자기 사망했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쏜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10.26 사태였다. 이때 국가 서열 1위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사실상 2인자였던 차지철 경호실장도 사라졌다. 김재규도 보안사로 끌려가면서, 대한민국은 권력 공백 상태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성공하기 어려웠던 쿠데타의 성공 수양의 '계유정난'은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다. 단종의 힘은 미약했지만, 그를 보필 하는 역할을 맡은 대신(고명대신)들의 힘이 강했다. 대표적으로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 등이 있었다. 이들이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마음만 먹으면 정적인 수양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대신들은 수양을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하고 견제했다. 대신들 뿐만 아니라 수양의 친동생인 안평도 수양을 견제했다. 수양은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최종 승리는 수양에게 돌아갔다. 대신들이 수양을 제거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게 결정적이었다.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했을 때, 단종을 빠르게 설득한 뒤 저 멀리 유배를 보냈어야 했다. 아울러 수양의 수족들을 단호하게 척결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반면 수양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나아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쿠데타 당일 날, 일부 사람들이 이탈하는 소동이 있었음에도 수양과 한명회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김종서를 척살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로 쳐들어가 반대파들을 신속히 처단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극적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