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매년 '참수 작전'을 반복하는가

이란이 폭격당하고 불타고 있다. 가자에서도 많은 어린이가 죽거나 다쳤다. 가슴이 쓰리고 슬프다. 우리 인류가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가 하는 자괴감까지 든다. 그런 가운데 지난 2월 18일 밤, 서해 상공에서 한국·미군 전투기들이 훈련 중 중국 전투기의 대응 출격과 대치를 겪었다. 단발성 해프닝이 아니다. 최근 수년간 같은 패턴의 위기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는 3월 9일부터 한미연합훈련 '자유의 방패(FS)'가 실시된다. 작년에 비해 축소되었다지만, 공세적 연습의 구조는 여전하다. 이 두 사건이 우연히 겹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관성적인 군사 연습이 과연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담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원치 않는 불행의 도화선을 당기고 있는가. 이 칼럼은 한미연합훈련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훈련 방식이 2026년의 지정학적 현실과 맞는지,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미래와 정합성을 갖고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억제력의 공과를 공정하게 따져보자 한미연합훈련이 오늘날까지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시각은 성립한다. 1953년 정전 이후 70년 넘게 전면전은 재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억제가 곧 평화는 아니다. 억제는 전쟁을 막는 소극적 조건일 뿐, 적대적 긴장 구조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북한은 2017년 이후 핵·미사일 능력을 질적으로 고도화했으며, 지금은 전술핵과 다양한 미사일 전력을 갖춘 단계에 이르렀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될수록,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의 신뢰성은 역설적으로 흔들린다. 냉전 시기 유럽 동맹국들이 "미국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뉴욕을 희생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던 것과 같은 딜레마가 한국에도 존재한다. 주한미군 수만 명의 존재가 이러한 불확실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한다. 억제 전략의 성공 지표가 '전면전 부재'라면, 그 이면에는 1·21사태, 천안함·연평도 포격, 끊임없는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등 회색지대 도발의 역사가 존재한다. 억제는 작동했지만, 지속 가능한 평화는 부재했다. 투키디데스 함정과 미·중 대립, 한반도 고대 그리스 역사서에서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전쟁의 본질을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신흥세력 아테네가 부상하면서 기존 강국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버드대 그레이엄 엘리슨 교수는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지난 500년간 신흥 강국과 기존 강국의 관계를 분석했다. 16개 사례 중 12번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단 4번만 평화적 권력 전환에 성공했다. 특히 충돌은 본토가 아니라 제3지역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반도는 바로 이런 조건에 해당한다. 2월 18일 서해 상공의 긴장처럼 작은 불꽃 하나가 국가적 위기로 번질 수 있다. 엘리슨이 분석한 전쟁을 피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명확한 세력 균형과 유연한 외교였다.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투키디데스 함정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중동의 참상은 이 교훈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이란·레바논·시리아·예멘·가자에서 이어진 전쟁들의 공통 구조는 수십 년 누적된 불신, 억제와 보복의 악순환, 외교 공간 소멸이 총성으로 이어진 사례다. 한반도는 이 구조를 그대로 안고 있으며, 그 위에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재래식 전력과 핵무장 국가가 공존한다. 충돌이 시작되면 첫 72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 보호막의 역설, 주한미군 기지의 위험 냉전 시대, 주한미군은 북한 남침을 막는 '인계철선'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26년 지정학은 달라졌다. 미·중 전략 경쟁이 군사적 대결 국면으로 들어서면서, 주한미군 기지의 전략적 의미도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