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시 동공원에 집결한 부대원들이 숨을 죽였다. 남부군 승리사단 김흥복 부대와 송관일 부대는 1951년 5월 20일 속리산을 출발해 연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동했다. 청주에서 10km 떨어진 가래산(청원군 낭성면 인경산)에 도착한 것은 5월 25일이었다. 당 열성자 회의 비를 흠뻑 맞은 남부군이 가래산에서 '당 열성자 회의'를 개최했다. 승리사단 정치주임 김갑제로부터 당원들의 전투 과업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이어 비상한 결의를 표명한 토론이 벌어졌다. 김흥복 부대의 최복산은 "나는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당과 수령을 위해 맡겨진 청주형무소 해방 임무를 죽음으로써 수행하겠다. 우리들의 굳은 결의를 총사령관 동지께 반영시키기 위해 맹세문을 채택하고, 거기에 각자의 서명을 할 것을 제의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충북도청 공격 임무를 맡은 박종섭의 결의가 있었다. 토론은 한동안 계속됐다. 먹물을 머금은 듯한 어두컴컴한 곳에는 빨치산의 눈과 누런 이만 보일 뿐이었다. 당 열성자 회의를 마친 후 대열의 이동이 시작됐다. 대원들은 미끄러운 논둑길에서 여러 번 넘어졌다. 속리산에서 가래산을 경유해 동공원(당산, 해발 104.5m)까지 가는 동안, 대열 중간중간에 간부들이 음밀성 보장을 위해 지도·점검을 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기침 소리도 군경과 주민에게 적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마을로 올라오는 나무꾼과 나물을 뜯으러 오는 여성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마을을 통과할 때 개가 짖으면 대원 전원은 발소리를 죽였다. 대원이 기침을 하려고 하면 간부들이 수건으로 입을 막기도 했다. 대원들은 청주에 도착하기까지 5일 동안 세수를 하지 못했다. 또한 밥을 지어 먹지도 못했다. 밥을 지으려면 불을 피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쌀을 씹어 먹어야만 했다. 5월 25일 오후 7시 15분, 가래산에서 출발했다. 5리(2km)쯤 지났을 때 길을 찾지 못해 1시간 30분이나 지체했다. 간부와 대원들은 '이러다 작전이 실패하는 것은 아닌지' 초조해했다. 결국 간부들은 작전 성공을 위해 일부 코스를 변경하고 뛰다시피 강행군을 했다. 남부군이 청주시 한가운데 있는 동공원에 도착한 것은 5월 26일 오전 1시였다. 옷은 보슬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남부군은 동공원을 지휘처로 삼고 우측에 송관일 부대를, 좌측에 김흥복 부대를 배치했다. 배치는 새벽 1시 20분까지 완료됐다. 경사 60도의 가파른 길을 뛰어내린 대원들은 주요 관공서 앞에 집결했다. 새벽 1시 45분, '두두두' 하는 기관총 소리를 신호로 유격대원들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이른바 '청주해방작전'이었다. 기관총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 빨치산의 만세와 함성이 뒤섞이며 청주 시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충북도청과 경찰국, 청주지방법원, 청주형무소, 청주방송국이 공격을 받았다. 관공서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날 청주해방 투쟁(청주시 습격)의 안내는 노동당 충북도당 간부들이 맡았다. 노동당 청주시당 위원장 신장식(청원군 강서면 원평리)과 강외면 쌍청리 출신의 박인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건이 발발한 날, 노동당 충북도당은 총사령부에 감사문을 보내기도 했다. 청주시 해방작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과 빨치산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인민군은 UN군의 상륙작전을 예상했지만, 그곳이 인천일 것이라고는 정확히 예상하지 못했다. 인천에 상륙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남한 일대의 인민군과 지방 좌익들은 크게 동요했다. 결국 인민군과 비정규군인 빨치산은 백두대간을 따라 북상하며 3·8선을 넘으려 했다. 북상 대열의 최고지도자 이현상은 1950년 11월 1일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승엽은 이현상에게 남조선인민유격대를 개편해 지리산 등지에서 싸울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11월 14일 남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가 창설됐다. 간부진은 다음과 같았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