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이 다가오면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이 숭고해지곤 한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역사의 어두웠던 터널 속에서 민간 주도 저항이 시작되었던 시기가 바로 3월이다. 107년 전,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날을 시점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충남 부여군 충화면은 부여에서도 인구가 가장 적은 면 단위이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계백과 팔충신(성충, 흥수, 복신, 도침, 억례복류, 곡나진수, 혜오, 계백)이 태어나고 활약한 충절의 유전자가 있는 곳이다. 이들의 유전자는 올해부터 107년 전 기미년 3월 6일 의로운 7인의 충화 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벌인 한 사건과 맥락이 이어진다. 그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1919년 3월 2일 부여 천도교구 김태호는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 40매를 받아서 논산으로 내려온다. 3월 5일에는 이 독립선언서 중 5매가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 박용화, 최용철의 집에 도달해 있었다. 일제강점기 팔충리에는 천도교인들이 많이 살았다. 서울에서 민족대표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를 읽은 이들은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비분강개하게 된다. 다음날 장날인 임천장터로 가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벽에 붙이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비밀리에 의기투합했다. 3월 6일 새벽,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에서 임천장터까지는 3십여 리 길(약 12km). 일제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뭉친 50여 명이 임천장을 향해 걸었다. 가슴 속에는 오직 조선 독립이라는 거대한 포부를 지닌 그들은 지나는 마을마다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임천장으로 향할 것을 설득했다. 그들이 마을을 지날 때마다 불어난 사람들은 임천관아가 보이는 충화면 만지리 솔고개에 이르렀을 때는 100여 명이 넘었다. 누군가 독자라서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이와 연로한 부모를 모시는 장남과 만삭의 부인이 있는 가장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목숨을 내놓고 가는 길이었다. 어쩌면 두 다리로 솔고개를 넘어 다시 충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험한 길이었다. 또다시 앞으로 닥칠 일이 두려운 자는 뒤 돌아보지 말고 마을로 돌아가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누구도 누가 오던 길을 되돌아갔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전 7시경 임천장터에는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충화면을 떠난 이들은 임천장터에 도착했다. 그들은 장꾼들과 어울려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벽이 붙이며 시끌벅적한 장날의 분위기를 거대한 시위 현장으로 돌변하게 했다. 그 중심에는 박성요, 박용화, 황우경, 문재동, 최용철, 황금채, 정판동 등 충화에서 출발한 7명의 의로운 이들이 있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