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세 번 고개를 숙인 이유... 내가 한국인임을 깨달았다

일본은 신사의 나라다. 일본 전체 편의점(5만여 개)보다 신사가 3배가량 많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하긴 골목길, 주택가에서도 크고 작은 다양한 신사를 볼 정도니까. 역사적 인물부터 신화 속 존재, 동물, 자연 등 수십만 수백만의 신을 모신다고 하니, 우리와는 사뭇 다른 문화이다. 신사 방문 시 예법이 있다. 신사에 들어갈 때 고개를 숙인다거나 입구에서 물로 입과 손을 정화를 한 뒤 본당에 절을 하고 퇴장 시 다시 목례를 하는 방식 등이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일본인이 아닌 바에야 신사 안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정도면 무난하지 않나 싶다. 그런 내가 두 달간의 일본 생활에서 고개를 숙인 적이 있다. 그것도 무려 세 차례나. 모두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1월 중순, 우연찮게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꼭 찾아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원폭돔과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한국인 위령비. 그러고 보니 10년 전쯤 나가사키 여행 때도 평화공원과 원폭자료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한자로 '추도 나가사키 조선인 희생자'라고 쓰인, 한쪽에 있는 작은 위령비 하나를 발견했다. 조선인 1만 5000명(추정)이 목숨을 잃은 현장에 추모 시설은 그것이 전부였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추모에서도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시마에서도 감정은 다르지 않았다. 원폭돔을 지나 10분여를 걸어가니 평화기념공원이 있었고, 한쪽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보였다. 비석이 공원 내에 세워지기까지 사연도 기구했다. 1970년 추모비 건립 당시 히로시마시가 '공원 내 위령비 건립 불허' 입장을 고수하여 공원 바깥에 세워졌다. 그러다가 재일동포들과 일본 시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1999년에서야 지금의 위치로 들어왔다고 한다. 진정으로 추모하고 있다기 보다는 마지못해 공간을 내준 느낌이랄까. 1945년 두 차례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 후 일본은 자국민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피해'만 줄곧 강조한다. 한국·조선인 사망자도 4만~5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외면하거나 감추려고만 한다. 이들은 일제에 강제동원 되었거나 생존을 위해 타국살이를 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떴다. 이들의 영혼은 누가 어떻게 달래줄 것인가. 원폭돔 앞의 설명도 다소 실망스러웠다. 원폭돔이 '세계유산'이라는 사실만 여러 나라 언어로 장황하게 강조하고 있을 뿐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앞으로 평화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자성이나 참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원폭돔은 단순한 관광명소가 아니지 않은가. 그날 추모비 앞에서 일본 생활 처음으로 머리를 숙여 동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해마다 8월 5일이면 동포들이 위령제를 연다고 한다. 이들의 희생과 죽음이 잊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나자와 윤봉길 의사 암장지 2월에는 출장 관련으로 가나자와시에 가게 되었다. 가나자와는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도시 전체가 역사 문화 예술 공간이다.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강력 추천하는 도시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