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노후 보장용' 퇴직연금은 이것밖에 없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확정기여형(DC: 회사가 매년 노동자의 임금 1/12 이상을 퇴직연금 계좌에 적립하고 근로자가 직접 운용 방법을 정해 퇴직금을 쌓는 제도) 퇴직연금인 401(K)과 개인퇴직계좌(IRA)에서 1년 새 2조 달러가 넘는 자산이 증발했다. 주식 비중이 높았던 펀드들은 30% 이상 손실을 기록했고, 퇴직연금 전체 손실액은 4조 달러에 육박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도 충격은 반복됐다. 그나마 양적 완화 조처 등으로 더디게 회복했지만, 은퇴를 앞둔 이들은 막대한 손실액을 만회할 수 없었다. 퇴직연금은 투자위험뿐 아니라, 시장위험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즉, 투자를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시장의 불안정한 변동성과 불확실성에 그대로 노출되는 구조다. 노동자의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목표와 '금융상품 투자'라는 수단 사이에는 근본적인 부조화와 긴장이 존재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지적처럼 시장은 스스로 위험을 관리하지 못한다. 이러한 목표와 수단 간 괴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공적 규제와 개입뿐이다. 지난 2월 6일 고용노동부는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TF'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핵심은 두 가지다. 노후소득보장 강화를 위해 기금형을 활성화하고, 퇴직연금 사외적립 의무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선언은 '노동자의 노후소득보장'이라는 긴 항해에서 '길을 잃지 않는 분명한 나침반'이 될 수 있을까. 노동자는 고위험 저수익인데, 금융자본은 무위험 고수익? 퇴직연금은 지난 10년간(2015~24년) 매년 평균 약 15% 가까이 빠르게 성장하며 덩치를 키웠고, 어느새 총적립액은 431조 원(24년 기준)까지 증가했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16.9%에 달하는 수준이다. 체격은 커졌지만 체력까지 좋아진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퇴직연금 연환산 평균수익률은 2.31%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평균수익률 6.5%를 기록한 국민연금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확정급여형(DB: 노동자가 퇴직 시 받을 연금액이 근무 기간과 퇴직 전 임금에 따라 사전에 확정된 제도)은 수익률과 상관없이 퇴직금과 동일하게 약정된 몫을 보장한다. 그러나 수익률에 따라 급여액이 달라지는 확정기여형은 사정이 다르다. 실적배당형 상품이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더라도, 임금이나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수준이다. 시장이 상승할 때는 '자산 증식의 기회'로 선전하지만, 하락할 때 손실은 가입자 계좌에 반영된다. 확정급여형은 사용자가, 확정기여형은 노동자 개인이 고스란히 손실을 떠맡는다. 반면 퇴직연금 사업자는 수익률이 곤두박질쳐도 수수료를 떼어간다. 퇴직연금 사업자에게 운용 손실이란 수익 감소일뿐, 재무 손실로 이전되지 않는다. 2024년 결산 당시 퇴직연금 사업자의 수수료 수익은 약 1조 7천억 원으로 보고됐고, 2025년엔 약 2조 1천억 규모로 추산된다(연합뉴스). 불과 1년 사이 4천억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노동자는 '고위험 저수익'에 빠졌지만, 퇴직연금 사업자는 '무위험 고수익'을 누린 것이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퇴직연금의 구조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연금 도입 20년을 지나면서 확정급여형에서 확정기여형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2014년 70.5%를 차지하던 확정급여형은 2024년 49.7%로 20.8%포인트 줄어들었다. 반면, 확정기여형은 21.7%에서 26.8%로, 개인형 퇴직연금은 7.9%에서 23.1%로 확대됐다. 사용자가 투자위험과 시장위험을 책임지던 구조에서 점차 노동자 개인이 감당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퇴직연금 20년 위험한 성적표: 정부가 설계하고, 금융자본이 주도 퇴직연금 초기에는 노동자의 수급권 보호를 위해 주식형 등 위험자산의 투자 한도를 40%로 엄격히 제한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퇴직연금의 손실 규모가 작았던 것은 제도 초기라 적립금 규모가 작았던 측면도 있지만(약 6.6조), 대부분(82%) 원리금 보장형으로 운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익률 제고'라는 미명 하에 안전장치는 하나씩 해체되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퇴직연금 활성화 방안'으로 확정기여형과 개인형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투자 한도를 70%까지 대폭 허용하고, 주식형 펀드 투자와 실적 배당형 상품을 확대했다. 2018년에는 TDF(타깃데이트펀드: 투자자의 은퇴 시기에 맞춰 주식과 채권 비중을 조절해 운용하는 펀드)를 통해 사실상 100% 주식 투자가 가능한 우회로가 열렸다. 2022년 도입된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 옵션)는 자동으로 고위험, 고변동성 상품에 편입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기존에는 체불 예방과 수급권 보호를 위해 퇴직신탁이나 퇴직보험처럼 기업이 은행이나 보험사에 퇴직 부담금을 맡기고 이자를 받는 방식이 있었다. 하지만 금융자본 입장에서는 그다지 돈이 안 되는 장사였고, 2010년에 폐지됐다. 정부 역시 기업들이 퇴직연금으로 갈아타도록 유도하기 위해 퇴직금 비용에 대한 세제 인정 한도(손금산입)를 축소해 오다 2016년에 완전히 없애버렸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