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을 26명까지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지난달 28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조희대 대법원장은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이달 3일 그가 "갑작스러운 개혁과 변혁이 과연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혹시 해가 되는 내용은 없는지 마지막까지 한번 더 심사숙고해주시길 국민들께 간곡히 부탁드린다"라고 발언한 일이 보도됐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을 마지막으로 심사숙고하는 쪽은 국무회의이므로,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 행사를 촉구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현행 14명인 대법관 정원이 이번 개정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하게 됐지만, 이것이 상고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6명이라는 숫자는 1950년대 후반의 재판 수요에나 맞는 규모다. '대법관판사'가 있었다? 1959년 1월 13일 개정된 법원조직법 제5조 제1항은 "대법원에는 대법관 및 판사를, 고등법원·지방법원에는 판사를 둔다"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 구성원은 대법관과 대법원판사로 이원화됐다. 이 이원화의 실태를 들여다보면 상고심에 대한 당시의 수요를 가늠할 수 있다. 당시 헌법 제72조 제11호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법관을 임면한다고 규정했다. 대법원판사에 관해서는 이런 헌법 규정이 없었다. 이로 인한 위상의 차이에 더해 권한의 차이도 있었지만, 대법원판사 역시 대법관과 함께 대법원의 재판 업무를 수행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대법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점은 사법부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1995년에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 역사서인 <법원사>는 이승만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악에 맞서 싸운 국민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해 준 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 사건은 피고인이 1959년 12월 11일 제1심 법원에서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시위에 대하여 경범죄처벌법과 도로취체규칙을 적용한 유죄판결을 선고받자 대법원에 비약상고한 사건으로서, 김연수 대법관(재판장), 사광욱·계창업·홍남표·김홍섭 대법원판사가 무죄를 선고하였다." 1심 선고 뒤 항소심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에 곧바로 상고된 이 시국사건을 담당한 대법원 재판관 5인 중 넷은 대법원판사였다. 대법원판사가 80%나 참여한 상태에서 대법원판결이 나왔던 것이다. 이들이 대법관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대법원판사들의 이전 직책에서도 확인된다. 1959년 1월 14일 자 <동아일보>는 대법원판사로 내정된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한성수는 법원행정처장이고 사광욱은 대구지방법원장이고 나항윤은 광주지법원장이고 최윤모는 청주지법원장이라고 소개했다. 지금의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법관이 되기 직전에 거쳤던 직책이 대구지방법원장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