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쇳덩이가 연신 머리 위로 추락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미사일이 지나간 후 떨어진 파편이었다. 예루살렘에서 20여㎞ 떨어진 예리코의 숙소 옥상에서 먼 하늘을 바라보니 굉음과 함께 미사일이 터지고 있었다. 불꽃놀이 같다는 생각은 이내 공포심으로 바뀌었다. 머릿속엔 ‘한시라도 빨리 이스라엘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윤정태(54)씨가 그곳을 벗어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그는 5일 서울신문과 전화 인터뷰에서 “미사일이 어느 한 곳을 향하는 게 아니라 불특정하게 마구 쏟아졌다”며 “현지인이 아니라 방공호 위치도 몰랐다. 숙소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극에 달했다”고 전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국내 한 고고학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윤씨와 동료 4명은 지난달 28일 유적지 답사를 위해 이스라엘 북부의 헤르몬산에 올랐다가 동쪽인 요르단 방면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목격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처음 타격했던 날, 이란이 곧바로 반격에 나선 것이다. 윤씨는 주변국과 교전이 잦은 이스라엘이 방공망 아이언돔을 가동하고 있으니 보호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윤씨 일행이 하산하는 짧은 시간 동안 이스라엘 전역은 격전지로 변해갔다. 이스라엘 한 방송사는 예루살렘 인근 도시인 벳세메스에서 폭발물에 의해 현지인 17명, 텔아비브에선 필리핀 국적의 중년 여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긴급 보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언론 보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방송에선 전쟁 사망자 수를 12명, 17명, 20명 등 계속 추가 집계했다”며 “무조건 탈출부터 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여행자 앱으로 대사관 피난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떠날 시간을 알 수 없어 막막했다”고 털어놨다. 출입 통제한 군인 향해 “떠나야 한다” 절규 예리코를 떠나 주이스라엘 한국 대사관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첫 단계부터 고행길이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통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윤씨는 군인들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우리는 외국인이고 전쟁을 피해 떠나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의 절규를 들은 군인들은 통화로 상부의 허락을 받은 뒤에야 문을 열어줬다. 1일 오후 예루살렘에 도착한 윤씨 일행은 이집트 카이로로 향하는 버스의 출발 시간이 3일 오전 8시로 확정되자 마침내 한숨을 돌렸다. 국경 지역을 통과하는 데만 5시간이 걸리는 등 15시간이 넘는 강행군이었지만 전쟁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했다. 윤씨는 “돌아보면 예루살렘에서 머리 위로 미사일이 오간 며칠을 보냈던 게 믿기지 않는다”면서 “생사의 길에 놓였던 순간이 꿈에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낯선 카이로에 발을 디딘 윤씨는 이집트 한인회의 온정으로 숙식 걱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교민들이 윤씨 일행을 포함한 피난민들에게 집의 일부 공간을 내어준 것이다. 20여명은 현지 수녀원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등 예루살렘을 떠난 한국인 113명 모두 쉴 곳을 구했다. 7일 튀르키예 이동, 11일 한국행 고향에 돌아갈 방법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예루살렘의 벤구리온 공항을 비롯해 카타르 도하,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등 주요 공항들이 폐쇄하면서 하늘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항공료도 천정부지로 오른 상황이다. 이란에 머물렀던 한국인들은 투르크메니스탄, 튀르키예를 거쳐 이날 귀국했다. 윤씨는 7일 튀르키예로 이동한 다음 11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계획이다. 기존 출발지는 두바이였지만 폐쇄 조치에 따라 직접 항공사에 연락해 이스탄불로 변경했다. 그는 “최근 며칠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며 “미사일을 맞을 수 있다는 공포감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안도했다. 이어 “고국의 연구소로 빨리 돌아가 마음부터 회복하고 싶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 작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꼈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