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식을 상대할 사람은 홍 선생밖에 없소이다." "글쎄요. 나는 이미 불출마 선언을 했는데..." 초대 지방선거에서 충북 청주시 유력자인 김지준이 홍원길에게 도의원 출마를 권유한 자리였다. 초대 지방선거와 홍원길의 등장 당시 청주시의원은 청주시를 5개의 선거구로 나누어, 각 선거구당 다득점자 순으로 4명씩 뽑아 총 20명을 선출했다. 충북도의원은 청주에서 다득점자 순으로 2명을 선출했다. 출마자들의 셈법은 복잡하게 작용했다. 도의원에 출마해도 무난할 이민우는 시의원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도의원에는 김지준이 나가도록 했다. 자유당에서는 이미 신형식과 최동선이 출사표를 던진 상태였다. 주변의 만류로 출마 의사를 접은 김지준은 홍원길에게 도의원 출마를 강권했다.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신형식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무소속 홍원길을 중심으로 모였다. 초대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홍원길은 원래 지방의원에 출마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주변의 권유와 당시 선거법상 도의원에 당선돼도 사퇴하지 않고 1954년 실시될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자격이 부여된 점 때문에 출마를 결심했다. 즉, 국회의원에 뜻을 두고 있던 홍원길이 2년 동안 정치적 공백으로 있느니, 워밍업 차원으로 도의원에 출마한 셈이었다. 그는 '지방분권 확립'과 '민본행정 구현'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 지방자치라는 정치적 이슈가 큰 주목을 받기는 어려웠다. 사실 홍원길이 인기를 얻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충주의 아나키스트 서상경의 지원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이기도 했던 서상경은 청주에 와 '내가 본 홍원길'이라는 즉흥시를 지었다. 홍원길 선거운동 진영에서는 개인 연설회 때마다 서상경의 시를 낭독했다. 그 시는 전쟁으로 고단했던 시민들의 심신을 위로하며, 깊은 감명을 주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이러저러한 이유로 홍원길은 청주시에서 최다득점을 기록하며 1952년 5월 10일 실시된 초대 충북도의원에 무난히 당선되었다. 차점자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충북도회의원을 역임한 최동선이었다. 청원군에서는 군수와 도청 과장을 역임한 한정구와 군수 출신 장응두, 반민특위 조사관 출신 전병수, 이장 출신 민병두가 당선되었다. 청주·청원에서 도의원에 당선된 6명 중 홍원길과 한정구만 무소속이었고, 나머지 4명은 자유당 소속이었다. 사실상 무소속도 친여세력과 다름없었다. 청주시의원에는 서병돈, 전명식, 이대원, 송재근, 서재조, 김용식, 이민우 등 20명이 당선되었다. 당선자들의 당적을 보면 자유당 11명, 민국당 1명, 한청(대한청년단) 2명, 무소속 6명으로, 여권 계열이 절대다수였다. 전쟁 속의 지방선거와 대통령의 정치적 전략 전쟁 중 지방선거를 치렀다는 이야기는 낯설기만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선거'를 1991년에 처음 실시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처음 지방선거가 실시된 것은 휴전협정 이전인 1952년이었다. 경기도, 강원도, 서울특별시는 완전히 수복되지 않아 도의원 선거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7개 도에서는 5월 10일 도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도의원 선거 이전인 4월 25일, 시·읍·면 의원 선거가 이미 치러졌다는 것이다. 군의원 선거는 없었지만, 행정의 가장 밑바닥인 읍·면 단위에서 의원을 뽑았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전란 중에 어떻게 지방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일까?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