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은 은신처가 마련되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 은밀히 각지에 사람을 보내, 흩어진 도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동학체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갑자년 이후로부터 도인이라는 사람들은 혹 죽고 혹은 살아남은 사람도 있으며, 혹은 도를 버리고 서로 상통(相通)하지 않아, 오랫동안 발길이 끊어져, 피차간에 서로 보기를 원수 보는 것과 같이 하기도 하며 서로 왕래를 하지 않았다. 주인은 산으로 들어간 뒤, 몸은 산옹(山翁)이 되었고, 농사일에 극력 힘을 쓰며, 스스로 발각되고 또 노출될 위험을 없애 버렸다. 그러나 이즈음 선생의 집은 그 생활의 어려움을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윤석산 역주, <초기동학의 역사>, 123쪽) 이즈음 국내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비롯 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 각지의 민란에 이어 예언서라는 <정감록>이 나돌아 민심을 더욱 뒤흔들었다. 1868년 8월 정덕기라는 인물은 자신이 정도령이라 칭하며 난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였다. 1871년 4월의 신미양요에 이어 비슷한 시기에 동학도 이필재가경상도 영해에서 교조신원을 내세우며 거사에 나섰다. 이필재는 거사를 준비하면서 측근을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직접 최시형을 찾아와 교조신원에 함께 나서길 간청하였다. 최시형은 대단히 신중한 품성의 인물이다. 이에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 그 말을 듣건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여겼다. 다만 마음에 시험할 뜻이 있어, 며칠을 머물며 그 동정을 살펴보니, 하루에 서너 번 변하면서도 오직 한가지로 선생님의 원통함을 이야기하니, 이런 까닭으로 억지로 따르기는 하여도 미심쩍은 바가 있어 결정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말하기를, "천만 가지 일이 빨리 하고자 하면 실패하는 것이라. 물러나 머물면서 가을에 일을 일으키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필제가 소리 높여 크게 말하기를 "나의 큰일을 그대가 어찌 물리쳐 멈추고자 하는가? 다시는 번거로운 소리를 하지 말라."(앞의 책, 147쪽) 최시형은 이필재가 수운의 기일을 택해 교조신원을 위해 영해에서 봉기하겠다는데 모른 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또 많은 도인들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봉기를 묵인 또는 양해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