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왜 사람들은 이웃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였을까?

증언자: 田畑潔(회사원) 학살 장소: 요코하마 시 남부 지역, 나카무라강·호리와리강(中村川·堀割川)일대 증언 내용: 요코하마 나카무라 초 주변은 목조 여인숙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이 여인숙들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수백 명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근처 친구 집을 방문하고 있다가 지진을 겪었다. 그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조선인 학살의 실태를 이 눈으로 자세히 목격하게 되었다. 지진 이틀 째 아침부터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돌아다닌다"는 유언비어가 퍼지자 곧바로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아이오이바시 근처에는 '네기시의 별장'이라 불리던 요코하마 형무소가 있었는데 지진으로 콘크리트 담장이 무너지면서 수감자들이 일시적으로 풀려났다. 이 죄수들까지 합쳐 약 800명 규모의 수색대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마을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밤새도록 사람 사냥을 계속했다. 붙잡혀 온 조선인은 경찰이 나이와 이름, 주소를 확인하고 보호할 틈도 없이 마을 수색대에게 붙잡혀 버렸다. 당시 분위기는 경찰관 자신도 자칫하면 살해될 수 있을 정도로 살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조선인을 둘러싸면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불어봐야 소용없다는 듯 각자 손에 들고 있던 죽창이나 군도로 조선인의 몸을 마구 찔러 댔다. 그것도 단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겁을 내면서 하나씩 공격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잔혹했다. 머리를 찌르는 사람, 눈에 죽창을 꽂는 사람, 귀를 베어내는 사람, 등을 때리는 사람, 발등을 찢는 사람. 조선인의 신음 소리와 욕설을 퍼붓는 일본인들의 고함이 뒤섞여 이 세상이라고 믿기 어려운 참혹한 장면이 펼쳐졌다. 이렇게 고문해 죽인 조선인의 시체를 구라키바시 둑 위에 늘어선 벚나무 가로수 가지에 매달았다. 그것도 한두 그루가 아니었다. 미요시바시에서 나카무라바시에 이르는 200그루가 넘는 나무에 피투성이 시체가 매달렸다. 그래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달린 채로 다시 린치를 가했다. 그곳은 인간이 할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지옥의 형장이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은 매달아 놓은 줄을 잘라 강 속으로 떨어뜨렸다. 강에는 수백 구의 시체가 떠다녔고 어제까지 맑던 물은 붉은 피로 물든 탁류가 되었다. 마을 수색대가 벌인 이 무서운 사형극은 계엄령이 내려지고 고후(甲府) 연대가 치안을 위해 들어온 뒤에도 닷새 이상 계속되었다. 조선인 사냥에 "공로가 있었다"는 이유로 죄수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받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담배와 쌀과 음식을 훔치고 술을 마시며 폭력을 저질렀는데도 오히려 대접을 받았다. 이 조선인 대량 학살이 일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조선인이 낮은 임금으로 일하면서 일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원망이 있었고 공사 현장의 구덩이에서 식사를 한다거나 마늘을 즐겨 먹는 생활 습관 차이 때문에 조선인이 특별히 더러운 것도 아닌데 더럽고 경멸 받아야 할 민족으로 차별받고 있었다. 또한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라는 일본인의 잘못된 우월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도 '니항 사건'에서 러시아인의 잔혹성을 비난하며 큰 소동을 벌였던 바로 그 일본인들이 그보다 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본성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談) 출처 <호(湖)> 1971년 9월호, 湖(우시오) 출판사, "고문하며 죽인 조선인의 시체를 강가의 벚나무 가로수 작은 가지에 매달아." 필자는 충청남도 천안시 아우내에 있는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의 관장으로서, 이 기사를 연재하려는 이유에 대해 먼저 밝히고자 한다. 첫째, 1923년 간토조선인학살에 대해 일본 정부는 2017년 11월 10일 중의원의 국회 질의에 대한 답변서에서 "역사의 해석에 관한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일본인이 쓴 증거와 문서로 반박하기 위함이다. 그간 일본 정부는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하여, 그동안 일본 의원들이 정부에 학살 사실과 국가의 책임 인정을 묻는 질문을 할 때마다 수십 년 동안 "자료가 없다"고 답해 왔다. 그래서 학살 현장에서 부단히 증언 채록과 자료 조사를 해 온 시민단체들이 전달한 자료를 제시하며 정부에 묻으면, 정부는 "그 자료는 공문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다시 계엄령과 관련된 문건, 후나바시 송신소에서 계엄령에 관해 송신한 내용의 문서, 각 지방에 이첩된 공문서 등 여러 '공문서'를 제시하면, 정부 측 관료들은 '그 문서를 증거 자료라고 답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고 궁색한 답변을 이어가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자료가 전하는 메시지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가 이 증언을 해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십 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해석하고 알리는 일을 해 온 1세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최근 한 사람씩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그분들이 생을 헌신해 모아 온 자료들은 100년도 넘은 이 사건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묻고, 그 의미가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이 만나는 관계의 장에서 공명되기를 바란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