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나 문학연구자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가 당연히 있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 세 명을 꼽자면 내가 주로 연구하는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 W.G. 제발트, 그리고 미야베 미유키이다.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여기서 자세히 쓸 수는 없다. 그중에서 에도 시대를 다룬 미야베의 시대 소설을 특히 즐겨 읽는다. 그의 소설은 읽으면 각 인물이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면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좋은 소설의 매력이다. 에도 시대는 1603년에 혼란한 내전을 수습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에 막부 정권을 세운 뒤 통치권을 일본 왕에게 반납하면서 막부가 사라진 1867년까지의 약 264년의 시기를 가리킨다. 전국 시대와 메이지유신 전야라는 양대 전란의 시대 사이에 있던 평화로운 쇄국의 시대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 사람들, 특히 하층 계급(상인, 농민, 여성 등) 사람들의 삶에 우여곡절이 없을 리 없다. 시대 소설은 그런 사람살이의 속내에 관심을 둔다. 미야베는 그 시대를 다룬 작품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에도 시대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이 강했습니다. 제가 에도 시대물을 계속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렇게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 때문입니다.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은 독자와 관객이 역사소설, 시대물, 혹은 역사를 담은 영화를 찾아서 보는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한다. 현재의 삶에서 사라진 것들,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 혹은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되풀이 확인하는 인간 군상과 관계의 모습, 지금 현실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다시 복원해야 할 것을 작품을 읽거나 보면서 다시 느끼고 생각하려고 역사소설과 영화를 본다. 왕위 찬탈, 그 후... 코로나 시기 이후 한국영화의 오랜 침체 상황을 깨면서 오랜만에 천만 관객을 넘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장항준 감독, 아래 <왕사남>)도 관객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내재적으로 분석하면서 <왕사남>의 한계를 지적하거나 혹은 칭찬하는 여러 반응이 있다. 영화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그런 평가의 타당성을 점검할 역량은 없고, 그것이 이 글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다. 다만 영화를 통해 우리 시대의 삶과 현실을 돌아보기 좋아하는 영화애호가로서 <왕사남>이 영화 내적으로 뛰어난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판단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이 영화가 거둔 흥행의 이유를 따져보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작품 자체의 성취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그 작품이 지닌 어떤 요소와 호소력이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례는 문학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예컨대 비평가로서 내가 판단하기에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든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그렇다. 나는 <왕사남>이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영화 내적 이유를 분석하기보다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돌아보게 된 우리 시대의 몇 가지 면모를 비추어 따져보고 싶다. <왕사남>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지만 그렇다고 단종의 비극적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분쟁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단종 복귀를 꿈꾸는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과 단종의 관계를 산발적으로 다루지만, 그것이 영화의 매력은 아니고 영화를 끌고 가는 핵심 동력도 아니다. 영화에서 권력자인 세조를 등장시키지 않는 이유겠다. 하지만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조의 충복인 한명회(유지태)를 통해 권력을 향한 욕망과 그 어두운 뒷면을 설핏 보여주기는 한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