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열풍이 당최 식을 줄을 모른다. 주변엔 세 번이나 봤다는 이도 있다. 장면을 외울 정도인데도 그때마다 울컥하게 된다며 추켜세웠다. 이번 주말엔 1박 2일 여정으로 영화의 배경인 청령포를 찾아 강원도 영월로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때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켰던 역사 만화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꺼내 읽고 있다는 이도 만났다. 그는 세종실록부터 중종실록까지를 다룬 4~8권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고 있단다. 단종의 죽음과 세조의 가계를 알아야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껏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이런 작품이 또 있었나 싶다. 영화를 보고 감동한 관객들이 공간적 배경이 된 지역을 부러 찾아가고 급기야 서점까지 찾아가 영화 속 사건과 관련된 책들을 뒤져서 읽는 모습이 낯설기까지 하다. 가히 '왕사남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하다. 단종이 최후를 맞은 청령포는 주중과 주말 가릴 것 없이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영월군을 다녀간 관광객 수가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인구수가 3만 5천 명 남짓의 영월군이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전국이 <왕사남> 영향권 <왕사남>의 파급력은 청령포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엄흥도의 자취가 남아있는 울산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엄흥도는 '역적'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후환을 당할까 두려워 고향을 떠났다고 하며, 그 후손이 울산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그뿐 아니다. 영화 속 악역으로 등장하는 한명회가 묻힌 충남 천안의 무덤에도,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 광릉에도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한명회가 말년을 보낸 한강변 압구정에 관한 호기심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압구정은 그의 호다. 또,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능지처참을 당한 사육신의 노량진 묘소와 그들의 생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전의 박팽년과 충남 홍성의 성삼문, 충남 서천의 이개, 경북 구미의 하위지, 경기 여주의 유성원, 경기 포천의 유응부 등, 말 그대로 전국이 <왕사남>의 영향권이다. 금성대군의 자취가 남아있는 경북 영주의 순흥면도 '핫스폿'이 됐다. 영화 속에선 단종의 윤허를 받아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는 곳으로 그려지며, 일약 '충절의 고향'으로 발돋움했다. 조만간 산 너머 영월과 연계하여 '왕사남 투어' 코스가 개발될 거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경기 남양주에 자리한 단종비 정순왕후가 묻힌 '사릉(思陵)' 또한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남편 단종이 사사된 후 무려 64년을 노비로 강등되어 살다 간 그의 신산한 삶이 서린 곳이다. '왕사남' 열풍으로 인해 최근 영월에 묻혀 있는 단종과 합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조선의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일괄 지정되어 있어 합장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왕후 혼자만의 외딴 무덤으로 소외되어 있던 사릉의 존재감이 부쩍 커진 건 고무적인 일이다. 사릉이 단종비 정순왕후의 묘소라는 사실을 최근 비로소 알게 됐다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가 궁궐에서 내쫓긴 뒤 평생을 보낸 서울 종로구의 정업원 터와 인근 동망봉(東望峯)도 찾는 관광객이 늘었다고 한다. 정업원 터는 그가 초가를 짓고 생계를 잇기 위해 염색일을 하던 곳이며, 동망봉은 그가 남편 단종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동쪽 유배지 영월을 바라보던 곳이다. 이렇듯 '왕사남' 열풍이 전국 방방곡곡을 휩쓸고 있지만, 의외의 '무풍지대'로 남은 곳도 있다. 단종비 정순왕후가 태어난 전북 정읍의 칠보면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당시 지방의 유력자였던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했고, 열다섯의 나이에 단종비로 간택되었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 않아서일까. 세조와 한명회, 금성대군 등은 물론, 단역으로 출연한 사육신들의 묘소와 생가에까지 관심이 쏟아지는 마당인데도 정작 정순왕후의 고향이 어디인지 궁금해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의 '비범했던' 삶을 떠올린다면 가장 먼저 찾았을 곳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