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짓 하고도 '화해'라니
...독일인들 생각하면 기가 차는 까닭

지난 15일 베를린 중구, 빌헬름가 92번지에 갔었다.이번 기사에 필요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베를린 회담' 기념비가 서 있어야 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베를린 회담은 1884년부터 1885년까지 당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총리의 주재로 진행되었던 '아프리카 나눠 먹기' 회담을 말한다. 바로 그 자리에 프로이센의 총리 관저가 서 있었다. 2차대전 중에 먼지가 되도록 폭격을 맞아 사라졌고 지금은 상업 시설들이 들어 있다. 콘크리트 기초까지 들어내고 말끔하게 뒤처리한 솜씨가 전문가 수준이었다. 단순 파괴범의 소행은 아닌 것 같았다. 당연히 시 당국에서 철거를 지시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스마트폰을 꺼내 탐색을 시작했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 당국이 철거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왜 가져갔을까? '탈식민 베를린 도시 투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활동가 '저스티스 므벰바'의 인스타그램에 단서가 있었다. 그가 1월 25일 투어를 할 때만 해도 멀쩡히 서 있었다고 했다. 나흘 뒤인 29일 가보니 없더란다. 그녀는 베를린 시청에 문의하지 않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수배했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이 기념비는 베를린 당국이 세운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포럼(Africa Forum e.V.)이 자체 제작해 (물론 시의 허가를 받고) 설치한 것이어서, 공식 분실 신고도, 시 홈페이지에 이에 대한 공지도 없었다. 베를린 경찰이 수배에 들어간 것이 3월 11일, 사라진 지 두 달도 더 지나서였다. 타이밍도 절묘하다. 2월 1일부터 '블랙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 행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베를린 블랙 역사의 달은 아프리카 계 독일인 조직 ISD가 1990년부터 매년 개최해 온 행사다. 마지막 날 이 기념비 앞에서 추모 행진을 할 예정이었다. 그만큼 이 기념비는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 역사의 핵심을 이루는 상징물이다. 범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짐작은 해 볼 수 있다. 나치 역사조차도 부정하는 사람들의 소행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소름이 끼쳤다. 베를린 회담 1884년 11월 15일, 바로 이 거리의 비스마르크 관저에서 유럽 14개국과 미국, 오스만 제국의 대표들이 회의 탁자에 둘러앉았다. 회담은 이듬해 2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목적은 간단했지만, 큰 이권이 걸렸으므로 치열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인가. 회의 이름은 훗날 '베를린 회담', 혹은 이 회의의 실질적 성과를 딴 '콩고 회담'으로 불린다. 당시 아프리카 대륙의 약 80퍼센트는 여전히 아프리카 전통 사회의 자치 아래 있었다. 유럽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무주지(Terra nullius)였다. 당연히 회의장 밖에도, 초대 명단에도 아프리카 대표는 없었다. 회의 결과물인 '베를린 의정서(General Act)'는 여섯 개 조항을 담았다. 콩고 분지의 자유 무역, 노예 거래 금지, 콩고강·니제르강의 항행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실효적 점령' 원칙. 이 원칙은 비스마르크 적 발상이었다. 요컨대, '네가 실제로 거기 가서 군대를 두고 지배하면 네 땅이다'라는 규칙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치열한 아프리카 땅따먹기 경주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14년 무렵 아프리카의 90퍼센트 이상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재편되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