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잔혹함에서만 오지 않는다. 사유의 결핍 위에 선 맹신에서도 온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결과가 어디로 가는지 판단할 지성을 갖지 못한 채 행사되는 힘은,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부터 무너뜨리고, 결국 스스로 적이라 여겼던 이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간다. 지금 미국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최강의 힘을 쥔 나라가 분별을 잃을 때, 역설적으로 동맹은 불안해지고, 그 나라가 경계하려 했던 쪽에는 오히려 기회의 여지가 열린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결과를 낳고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와 판단의 능력에 관한 문제다. 문제는 이미 드러나 있다. 미국이 무엇을 하려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다. 반복되는 결과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방식이며, 지금의 국제질서는 그 방식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 가장 가까운 곳이 먼저 무너진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결과는 이미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선택은 유럽을 점점 더 불안정한 위치로 밀어 넣고 있다. 중동 전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을 강화할수록, 그 충격은 유럽의 에너지와 물류 구조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전가된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과 홍해 항로의 불안정은 유럽 산업과 물가에 즉각적인 압박으로 작용하지만, 그 위험을 통제하는 권한과 그 비용을 감당하는 주체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비대칭은 점점 더 분명해진다. 미국은 개입의 범위를 결정하지만, 그 결과로 발생하는 경제적·안보적 비용은 유럽이 떠안는다. 홍해 사태에서 유럽이 독자적으로 항로 방어에 나선 것은 선택이라기보다 구조적 강제에 가깝다. 개입은 미국이 만들고, 그 후속 부담은 유럽이 감당하는 방식이 고착되고 있다. 에너지 영역에서는 그 효과가 더 직접적이다. 중동 긴장이 고조될수록 유가와 운송 비용은 상승하고, 그 충격은 미국보다 유럽 경제에 더 크게 작용한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부담의 분배는 균등하지 않다. 그 결과 유럽은 외부에서 보장되던 안정 대신, 스스로 불확실성을 관리해야 하는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동맹의 성격이 바뀐다. 보호의 구조는 점점 약해지고, 비용의 구조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미국의 개입은 질서를 강화하기보다 새로운 불확실성을 만들어내고, 그 불확실성은 가장 가까운 동맹부터 흔들어 놓는다. 같은 충격, 다른 결과 그런데 같은 작동이 다른 방향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중동 전쟁은 그 변환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전쟁이 확대될수록 에너지 가격은 오르고, 국제사회의 시선은 분산된다. 이 두 가지 변화는 곧바로 다른 곳에서 효과를 낳는다. 그 효과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러시아다. 유가 상승은 곧 러시아의 재정 여력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최근 중동 긴장 속에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러시아의 에너지 세수는 단기간에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같은 충격이지만, 유럽에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러시아에는 현금 흐름으로 바뀌는 구조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쟁의 무게가 중동으로 이동할수록 우크라이나 전선은 상대적으로 뒤로 밀린다. 지원과 관심이 분산되는 사이, 러시아는 압박이 완화된 상태에서 시간을 번다. 전쟁은 길어지고, 그 시간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