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의 아이러니... 박정희를 일으키고 무너뜨린 도시

지금은 창원시에 편입돼 있는 마산은 박정희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1960년에 3·15 마산의거를 계기로 확산한 4·19혁명은 박정희라는 43세 된 군인이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었던 그는 3·15부정선거에 개입한 군부 지도부를 겨냥해 정군운동을 펼쳤다. 박정희는 미국의 지지를 받는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3·15부정선거를 도운 군부 지도자는 물러나라'는 서한을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 제1권은 그해 5월 2일에 보낸 이 서한으로 인해 "군이 술렁거렸다"고 알려준다. 결국 송요찬은 17일 뒤 사표를 썼다. <한국사 연구> 2012년 제158호에 실린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의 논문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과 5·16 쿠데타'는 "박정희 소장과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추진한 정군운동은 그 의도와 동기는 어떠하든 4월혁명 직후 전 사회적으로 조성된 개혁 요구에 부합"했다며 "여론의 관심과 지지도 받았다"고 설명한다. 육사 2기 박정희는 육사 5기(정승화 등) 및 육사 8기(김종필 등)와 함께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1960년에는 육사 8기와 함께 군부 적폐의 청산을 촉구하는 정군운동을 벌였다. 1년 뒤에 쿠데타를 주도할 인적 구조의 절반이 이때 꾸려진 것이다. 정군운동으로 인해 박정희가 군부 지도자로 급부상함에 따라 그의 포섭 작전에 힘이 실렸고, 포섭 대상 상당수는 그가 순수한 군인이며 정변 뒤에 원대복귀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4·19혁명 당시 부산에 있었던 박정희는 마산에서 끓어오른 시민혁명 열기에 편승해 훗날의 쿠데타에 유리한 기반을 확보했다. 이런 점에서 마산은 박정희가 정치적으로 일어서는 데 도움이 된 곳이지만, 그러나 이곳은 결국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죽이는 곳이 됐다. 마산과 부산을 무대로 1979년 10월 16일 시작된 부마항쟁은 박 정권을 분열시켜 박정희가 10일 뒤 자기편에게 죽임을 당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마산은 1960년에 이승만을 끌어내린 데 이어 1979년에 박정희를 죽게 만든 도시다. 마산발 시민혁명 열기에 편승해 정치적 위상을 높였던 박정희는 마산이 보여준 민주주의 정신을 거역하다가 19년 뒤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대통령 "5·18 정신, 부마민주항쟁도 헌법 전문에 넣자" 이처럼 민주주의 투쟁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마산'의 앞 글자가 '부산'의 앞 글자와 더불어 헌법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17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5·18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부마민주항쟁을 헌법에 함께 수록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다고 발언했다. 부마민주항쟁 경남·마산·부산 동지회를 비롯한 7개 단체는 19일 성명서를 통해 환영의 뜻을 표하면서 국회의 초당적 협력을 촉구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