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짓눌린 두 얼굴, 완전히 다른 두 결말 2020년 5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거리에서 검은 얼굴의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는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질식 당하고 있었다. 그는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했지만 경찰들은 그의 목소리를 끝까지 외면했다. 백인 경찰들의 인종차별적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은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고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것은 세계적으로 확산했던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80년 4월, 한국 강원도 사북의 좁은 언덕길에서 검은 얼굴의 광부 원일오는 경찰 지프차 바퀴에 짓눌려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마치 죽은 듯 보였지만, 지프차에 탄 순경들은 바퀴가 사람 몸통을 완전히 타 넘은 것을 알고도 그냥 도망쳐 버렸다. 경찰 지프차의 만행에 분노한 수백 명의 광부들은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고 외치며 시내로 몰려가 사북지서를 파괴했고, 이것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북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두 사건은 여러 면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다. 사건의 피해자들은 검은 색으로 상징 되는 사회적 약자들이었고, 그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도를 넘는 공권력의 폭압이 발생했으며, 피해자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그로 인해 집단적 분노가 대규모로 촉발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 이후의 경로는 두 사건이 완전히 달랐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의 경찰 폭력 사건은 당시 체포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조지 플로이드라는 이름은 부당하게 핍박 받는 약자들의 상징이 되었고, 결국 가해자인 경찰 데릭 쇼빈(Derek Chauvin)은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세워졌다. 그러나 1980년 사북의 경찰 폭주 사건은 지금까지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아 피해자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그 일로 이름이 밝혀진 경찰 중 그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다. 이 차이는 단순한 사법적 결과를 넘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와 연결된다. 사북에서는 사건의 원인이었던 경찰 폭력 대신, 그로 인해 촉발된 광부들의 폭력성이 부각되었다. 비상계엄으로 온 나라가 숨죽이던 시절, 난데없이 전해진 인질난동극, 파괴된 지서, 박살난 광업소 등 온갖 파괴적 이미지로 인해 원일오와 광부들은 '피해자'이기는커녕 '폭도'로 낙인 찍혔다. 지워진 출발점 1980년 사북사건은 광부들의 이유 없는 난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적어도 1년 가까이 누적된 노조 파행과 이로 인한 광부들의 좌절감이 있었다. 1979년 노조지부장 선거에 대한 무효 결정 이후 재선거 지연 사태, 광부 2568명의 노조직선제 청원, 정보기관의 개입과 직선제 무산, 1980년 3월 노조지부장 직무대리와 회사 간 임금협상 일방 합의 등 광부들의 불만을 키운 여러 일들이 있었다(광산노조, <사북사태 발생에 대한 진상>, 1980, 23쪽).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1980년의 사북이 광부 항쟁의 필연적인 무대가 되어야 할 것은 아니었다. 노조직선제를 위한 사북 광부들의 운동이 폭발적인 항쟁으로 전화된 데는 사태를 악화시킨 공권력의 결정적인 폭압 장면이 있었다. 1980. 4. 21. 14:00경 사북지서장과 노조지부장 이재기가 약속했던 노조집회가 계엄당국에 의해 불허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노조원들은 노조사무실에 몰려가 노조부지부장 홍금종에게 항의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사진 채증을 하던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 경찰관이 광부들에 의해 발각되었다. 사복 경찰관이 노조사무실 1층 창문을 넘어 노조사무실 앞마당에 대기 중이던 경찰차량을 타고 달아나려 하자 주위의 광부들이 경찰차량을 가로막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3.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151쪽) 경찰들은 광부들을 향해 그대로 지프차를 몰았고 이때 노조원 원일오 등 서너 명이 차량에 치어 나뒹굴었다. 진술과 의료 기록을 종합하면 경찰 지프차의 바퀴는 광부 원일오의 허리와 골반을 타고 넘어가 방광 탈구 등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 그런데도 경찰차는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달아났다. 사람들은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고 외치며 경찰 지프를 뒤따라 사북지서로 몰려갔다. 사북항쟁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군부는 경찰이 관여된 최초의 폭력 사건을 감추는 대신, 그것이 촉발한 광부들의 집단 폭력을 확대해 사건의 서사를 바꾸고 책임의 소재를 이동시켰다. 그 때부터 광부들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아 난동을 저지른 통제 불능의 폭도로 재현 되었다. 그 바람에 사건의 핵심 당사자로서 공권력의 1차적인 책임과 그 이후의 잔혹한 국가 폭력마저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사북사건'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광업소 파괴나 노조지부장 부인 폭행과 같은 광부들의 폭력적 대응을 떠올린다. 물론 그것들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군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다. 사북사건에 대한 기억은 시작부터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뒤틀렸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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