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현미'가 공들여 모셔온 작가, 기대가 너무 컸나 봅니다
오마이뉴스

'국현미'가 공들여 모셔온 작가, 기대가 너무 컸나 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26년 새롭게 선보인 '국제거장전' 시리즈의 첫 주자로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를 선정했다는 소식은 미술계를 넘어 대중들에게도 큰 화제였습니다. 특히 8000원으로 인상된 관람료와 33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이번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지요. 저 역시 한국 미술계가 공들여 모셔온 이 '거장'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주말 소격동으로 향했습니다. 주최 측에 따르면, 허스트의 초기작부터 약 35년에 걸친 설치, 조각, 회화 등 50여 점을 이번 전시에서 선보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예산과 인력이 아니라면 국내에선 만나보기 힘들었을 수준과 규모'라는 언론보도도 있었습니다. 기대감이 컸지만 전시장을 돌아보는 내내 제 마음을 지배한 것은 예술적 감동이 아닌,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과 실망감이었습니다. 죽음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소년의 미소 전시는 '모든 질문에는 의심이 따른다'는 표제 아래 허스트의 20대 초반 작업을 조명하며 시작됩니다. 허스트는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를 통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직면해야 한다고 배웠다"며, 자신의 작업이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고야나 베이컨의 작품처럼 죽음을 삶의 일부로 끌어들여 삶을 이야기 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내세운 이 '실존적 직면'이라는 명분은 전시장 초입에서 마주한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윤리적 의구심으로 치환되었습니다. 저를 멈춰 세운 것은 16세의 소년 허스트가 시체 안치소에서 몰래 찍은 사진 <죽은 자의 머리와 함께>(1991)였습니다. 잘린 시체의 머리 옆에서 악동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제게는 기괴함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습니다. 작가는 훗날 이 사진을 전시하며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회상하며 자신의 예술이 죽음에 대한 집착과 공포에서 기원한다고 암시했으나, 이날 제가 느낀 것은 타인의 죽음을 자극적인 도구로 활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습니다.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사체를 전시장으로 끌어들였을 때 관객이 느끼는 윤리적 저항감은 거셀 수밖에 없겠고요. 시각적으로 압도하나 가장 큰 괴리감 지하 전시실의 거대한 공간을 차지한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은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허스트는 제작 당시 "당신을 잡아먹을 만큼 큰 상어"를 주문하며 죽음의 물리적 실체를 관객의 눈 앞에 들이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심오한 기획 의도는 '보존'이라는 현실적 한계와 충돌하며 그 숭고함을 잃어버립니다. 과거 보존 처리 미숙으로 상어가 부패하자, 허스트는 억만장자 수집가의 지원을 받아 상어를 교체하는 정밀한 '보수'를 단행했습니다. 허스트는 이를 두고 "나는 개념 미술가이기에 '의도'가 정답이며, 그러므로 똑같은 작품이다"라고 강변한 바 있고요. 이 지점이 바로 제가 이번 전시에서 느낀 가장 큰 괴리였습니다. 죽음의 물리적 실체를 보여주겠다면서 정작 부패한 실체는 폐기하고 새로운 박제물로 갈아 끼우는 행위는, 인간의 유한성을 성찰하는 예술이라기보다 '데이미언 허스트'라는 브랜드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시장 안에서 제가 확인한 것은 예술적 아우라가 아닌, 작가가 스스로 구축한 시스템을 통해 구현된 자본의 정교한 메커니즘뿐이라고 하면 다소 무리한 지적일까요. 예술이라기보다는 가학적인 실험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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