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저는 지독한 근시입니다. 안경을 벗고 수경을 쓰는 순간, 세상은 형태만 겨우 남은 뭉개진 수채화로 변합니다. 레인도 흐릿, 앞 사람도 흐릿, 앞에 서 계신 선생님도 그저 푸른 물빛 속의 아련한 실루엣일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5월 말, 이 흐릿한 시력이 제게 기막힌 반전과 함께 선물 같은 순간을 안겨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7시마다 저를 지도해 주는 참 고마운 선생님이 계십니다. 지상에서는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귀에 쏙쏙 박히게 영법을 쪼개어 가르쳐 주시고, 수업 중에는 직접 물속으로 입수 해서 회원 개개인의 서툰 자세를 일일이 잡아주시는 참 좋은 선생님이십니다. 그 친절한 가르침 덕분에 새벽 수영이 날로 즐겁고 좋아졌지만, 제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있었습니다. 일명 '평포자(평영 포기자)'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모았다가 미는 평영은 힘을 빼고 가면 가장 편안한 영법이지만, 속도를 내려는 순간 난이도가 급상승합니다. 똑같이 발을 차는데 어떤 사람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쭉쭉 나아가고, 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용을 써도 제자리에 둥둥 떠 있기 일쑤입니다. 자유형이나 접영 때는 나름 선두권을 유지하며 호기롭게 물살을 가르다가도, 평영만 시작하면 자진납세하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레인의 맨 뒷자리로 도망치곤 했습니다. 흐릿한 수경 너머로 들어온 것 그날 아침도 어김없이 평영 수업이었습니다. 다른 회원 분들의 속도를 당해내지 못해 결국 맨 뒷자리로 물러서면서도, 마음가짐 만큼은 여느 때와 달랐습니다. 비록 꼴찌 자리에 서 있을지언정, 선생님께 오늘 만큼은 잘해내 보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영혼을 갈아 넣으며 필사적으로 물을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종아리가 터질 것 같고 굳어버린 골반이 비명을 질렀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 이토록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찬 발차기가 또 있었을까요. 그 눈물겨운 사투가 통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 앞에 물속으로 직접 입수한 선생님이 성큼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 발을 붙잡으셨습니다. 발 안쪽 면으로 물을 밀어내야 한다며, 제 발목 각도를 직접 꺾어 쥐고 정교하게 교정해 주시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코앞까지 다가온 선생님의 하얀 수모 위에 적힌 영문 글자가 흐릿한 수경 너머로 가만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The POS(더 포스)' 그때는 숨이 가쁘기도 했고, 그저 디자인이 예쁜 수모이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물 밖으로 나와서도, 강습이 끝나고 탈의실로 향하는 내내 그 낯익은 글자가 이상하게 잔상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습니다. '어디서 분명히 봤는데...' 마침내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안경을 코끝에 걸쳐 쓴 순간, 뇌가 빛의 속도로 흩어져 있던 연결고리를 찾아냈습니다. 멈춰 있던 기억의 전구가 탁 켜졌습니다. 등줄기에 기분 좋은 소름이 확 돋았습니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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