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성안길 곳곳에는 "편집국장 김창기를 해외로 추방하라", "국민일보를 폐간 조치하라"는 등의 벽보가 나붙었다. 1953년 5월 <국민일보>가 대통령(大統領)을 견통령(犬統領)으로 잘못 인쇄하는 사고를 낸 것이다. 큰 '대(大)' 자에 점을 하나 잘못 찍은 것이다. 조판 과정에서의 단순한 실수였지만 1950년대 이승만 시대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충청북도의회와 청주시의회에서는 '국민일보 폐간 건의안'을 결의했다. 이로 인해 김창기 편집국장과 송경호 정경부장, 문선공 등이 수사를 받았다. 정경부장은 40일간 구속 수사 끝에 불기소 처분되었다. 그런데 <국민일보>가 폐간 조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견통령 사건 1년 전에도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1952년 5월 29일, 김성수 부통령이 국회에 낸 사표가 수리되었을 때도 <국민일보>가 문제시되었다. 그런데 김성수 부통령이 사표를 낸 데에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인한 헌정 유린 사태에 대한 항의 표시가 있었다. 수난시대 즉 이승만은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대통령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덧붙인 개헌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1952년 1월 18일 국회 표결 결과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과 대한청년단을 동원하여 '정부 개헌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국회의원 소환 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 지방의원들의 국회 해산 결의안도 가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이승만은 1952년 5월 14일 정부의 수정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수정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불법적인 쿠데타를 감행했다. 5월 25일 0시를 기해 잔존 공비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부산 일원과 전라남북도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날 약 40명의 국회의원을 태운 통근버스가 통째로 헌병대에 끌려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5월 27일 공보처에서는 구속된 의원들이 국제공산당의 비밀 정치 공작에 관련되었다고 발표했다. 5월 28일 국회는 부산지구 계엄령 해제를 결의했다. 5월 29일에는 김성수 부통령이 이승만의 헌정 유린 사태에 항의하며 초대 부통령 이시영에 이어 두 번째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2008).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김성수 부통령의 사퇴와 관련해 <국민일보>가 오보를 냈다. '이때 돌연 부통령이 사퇴'를 '이 대통령이 사퇴'로 보도한 것이다. 이는 <국민일보> 통신부장이 서울로부터 무전을 받는 과정에서 내용을 잘못 이해해 발생한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하지만 보도 결과는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었다. 편집국장 김창기, 편집부장 김진목, 통신부장 이응기, 번역기자 정아무개씨 등이 구속되었다. 편집부장은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국민일보> 수난 3탄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1953년 11월 '한·일 회담'을 '일·한 회담'으로 보도한 것이다. 사실 한국과 일본이 회담을 각기 표현할 때에는 자국의 국가명을 앞에 표기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국민일보>가 실수로 일본을 앞에 표기한 것이다. 정정 기사를 냈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편집국장과 정경부장 송경호, 문선공 등이 수사를 받았다. 정경부장은 40일간 구속 수사를 받은 끝에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로 인해 충청북도의회에서 '국민일보 폐간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국민일보> 출신 홍원길 의원은 "편집 과정에서의 단순한 실수이자 오보"임을 동료 의원들에게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폐간 결의안은 2표 차이로 통과되었다. 홍원길은 이에 항의해 1953년 11월 13일 의원직을 내던졌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국민일보> 폐간 조치로 인해 충북은 4개월 동안 신문 없는 도(道)로 지냈다. 4사 5입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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