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공'이란 말이 곳곳에서 활개 치고 있다. 한 대기업 부회장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경례 구호처럼 멸공을 쓰기도 했고, 지난해 혐중 시위에서는 대학생들이 '멸공'을 외쳤다. 급기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수감돼 있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한 초등학생이 썼다는 편지에는 '일거에 척결' '멸공' 같은 험상궂은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고 등장하고, 분식 프랜차이즈로 유명한 기업에서는 '멸공떡볶이'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멸공'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의 멸공은 혐오와 배제, 차별의 기호이다. 그들의 멸공은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멸공이 지시하는 대상이 북한과 중국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데, 그들이 적대시하는 북한과 중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과 중국이 아니다. 복잡한 국제질서와 남한 당국과의 외교적 관계 속에 놓인 북한과 중국의 정치적 환경 따위는 그들의 멸공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북한과 중국이라는 하나의 가상이 그들의 멸공이라는 말에는 작동하고 있다. 그들이 멸공은 추상적인 그물처럼 보인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그 그물에 걸려들면 그들이 정한 가상의 적과 동일시해 혐오와 배제, 차별의 대상으로 낙인찍으며 폭력적 공격의 표적으로 삼는다. 이런 방식으로 유통되는 멸공이라는 말은 파시즘적 언어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파시즘적 언어의 가장 주요한 특성은 '빈곤과 과장'이다. 나치 치하에서 저술한 빅토르 클램페러의 저작 과 <일기>를 분석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끝까지 증언하는 사람>에 따르면, 빈곤은 "왜냐고 없음"이고 "여지 없음"이다. 이 없음은 물론 전체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허용되지 않는 없음이지만 이 없음에는 논리 없음, 근거 없음, 맥락 없음을 포함한다. 이 없음이 언어의 빈곤을 낳고 이 언어의 빈곤이 도리어 최상급이라는 과장을 만들어낸다. 멸공은 반공의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들은 인간성을 기계화, 사물화한다. '멸'의 대상은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거대한 글자의 실체 멸공이 처음으로 내게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 마을엔 저수지가 하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저수지 둑으로 몰려가 멱을 감거나 둑 위로 자란 풀숲을 헤집으며 개구리를 잡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해 봄인가 수리조합에서 저수지 둑의 마른 풀에 불을 놓았다. 아이들 키까지 자랐던 풀들은 모두 타고 그 자리에 까맣게 재만 남았다. 그 까만 재 사이로 돌 글씨가 나타났는데, '멸공방첩'이었다. 글자 하나의 크기가 우리 집보다 컸다. 사실 그 글자는 워낙 커서 가까이서는 알기 어려웠다. 읍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오면서야 비로소 그 거대한 글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6.25 표어나 포스터 등을 통해 정확히는 몰라도 멸공이란 말의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버스 안에서 까만 재 위로 나타난 그 글자들을 본 순간 뻔하디뻔한 반공 교육의 내용과는 다른,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내게 밀어닥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이 소름이 돋아 경기하듯 몸을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