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or
이순신과 이원춘이 떠난 구례, 몰려오는 5만의 왜군들 | Collector
이순신과 이원춘이 떠난 구례, 몰려오는 5만의 왜군들
오마이뉴스

이순신과 이원춘이 떠난 구례, 몰려오는 5만의 왜군들

봄을 맞는 오후의 섬진강 강물에는 노르스름한 윤슬이 가득하다. 이 시간 강변에 나와 앉으면 세상사의 모든 시름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때쯤 나를 둘러싼 고민의 대부분은 휘발이 돼서 좋다. 살다 보면 가슴에 한 겹씩 차곡차곡 쌓이는 고민이 왜 없겠는가마는, 윤슬의 반짝거리는 위무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하는 것이다. 전남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 신촌마을 섬진강가에 나와 앉아 있다. 예전의 강 모양대로는 아니겠지만, 여기는 한때 이순신 장군이 시찰 나가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을 만나러 순천을 오가던 섬진강의 길목이었다. 이름하여 '잔수(潺水)'. 구례의 잔수 부근은 육상과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인 신경준은 그의 저서 <산수고(山水考)>에서, 순천의 황전천과 합류하는 잔수는 육로의 잔수역과 함께 포구가 설치돼 있다고 적었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통선(通船)이 다니며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었다고 신촌마을 주민들도 증언한다. 선조로부터 백의종군을 명받은 장군은 원래 도원수부가 있는 경남 초계(지금의 진주시)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마침 도원수가 전장 순찰차 순천에 나와 있다는 말을 듣고 구례에 머무르며 순천을 오갔다. 잔수에 앉아 오른쪽으로 눈 돌리면 섬진강 상류 방향으로 강 따라 나 있는 외길이 보인다. 이 길은 장군이 1597년 9월 14일 구례에서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치고 곡성으로 바삐 말을 달리던 길이다. <난중일기> 1597년 음력 8월 부분을 보자. 초3일 (전략) 석주에 이르자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와서 보고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저물 무렵에 구례현에 이르렀는데 읍내가 쓸쓸하였다. 성 북문 밖, 전날 머물렀던 집에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했다고 했다. 손인필이 곧바로 보러 왔는데 곡식까지 지고 왔으며 손응남은 때 이른 감을 가져왔다. 초4일 맑다. 아침을 먹은 뒤 곡성 땅 압록강원에 이르러 점심밥을 짓고 말의 병도 치료하였다. 고산 현감이 군인을 넘겨주는 일 때문에 와서는 수군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하였다. 오후에 곡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관청의 민가가 온통 비어 있었다. 이 고을에서 잤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곧바로 남원으로 갔다. 장군의 머릿속에는 하루라도 빨리 궤멸된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을 테다. 지척의 하동 근방에서는 이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2~1655)가 이끄는 왜 좌군 5만 7000여 명이 섬진강과 강가의 길을 따라 구례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들의 1차 목표는 남원성이었고, 2차 목표는 전주성이었다. 남원성은 호남의 동쪽 관문이었고, 전주성은 호남의 북쪽 관문이었다. 남쪽과 서쪽의 관문은 '이순신의 바다'였기에 이들은 육로를 통해 호남을 치기로 경상도 서생포(현재의 울주군)의 작전 회의에서 결정했다. 그러나 불과 보름여 전인 8월 28일, 거제도 칠천량 바다에서 원균(元均, 1540~1597)이 왜 수군에 대패한 이후 이순신의 바다는 사라졌다. 적들은 육로 대신 이 무주공산의 남해를 유유히 지나오다가, 육군은 사천에 상륙했고 수군은 섬진강을 타고 올라와 하동에서 합류했다. 전체 내용보기

Go to News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