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손병희가 입도하여 해월의 막하에서 수련과 포교활동을 벌일 때는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으로 정부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다소 느슨해졌다. 느슨했다기보다 당시 상황을 개괄할때 예전처럼 탄압할 여력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1880년 12월 정부조직이 개편되어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특별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고, 이해 최시형이 <동경대전>을 간행하였다. 1881년 4월 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되고, 6월에는 최시형이 동학경전을 한글의 가사체로 대중들이 읽기 쉽도록 하는 <용담유사>를 편찬하였다. 손병희가 동학에 입교한 지 7년이 지난 1889년 어느 날의 일이다. 청주감영에서 포졸 세 사람이 손천민을 체포하고자 그의 집을 수색하였다. 포졸들은 손천민이 집에 없으니까 부인을 연행하려고 하였다. 때 마침 이를 지켜 본 손병희가 함부로 여인을 잡아가느냐고 포졸들에게 야단쳤다. 그리고 자신도 동학도이니 대신 체포하라고 말하였다. 손병희는 포졸들이 포박하려들자 도망하지 않을터니 그냥 갈 것을 요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 주막에 이르러 포졸들에게 술을 권하고 자신도 거나하게 마셨다. 취기가 오르자 더 이상 걷기 어렵다면서 포졸들에게 업고 갈 것을 제의, 포졸 셋이 거구의 손병희를 업고 끙끙거리면서 청주관청에 이르렀다. 이때 청주영장이 큰 감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포졸들이 전후 사정을 보고하자 영장이 "왜 자수했느냐?" 물었다. 손병희는 큰 목소리로 "동학을 믿는 사람을 무슨 죄로 관가에서 체포하느냐"고 되물었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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