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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한국인"은 왜 천리포 야산에 수백억을 쏟아부었나 | Collector
오마이뉴스

"전생에 한국인"은 왜 천리포 야산에 수백억을 쏟아부었나

해방 후 가장 먼저 우리나라로 귀화한 서양인은 1966년 국적을 취득한 예수회 신부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한국명 길로련)이지만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줄곧 살다가 숨을 거둔 명실상부한 서양인 귀화 1호는 칼 페리스 밀러(한국명 민병갈)다. 1979년 11월 6일 한국 국적을 얻었다. 생소한 이름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충남 태안의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인물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경기도 포천시 광릉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는 8명의 얼굴 부조가 새겨져 있다. 2001년 개관과 함께 박정희, 김이만, 현신규, 임종국이 헌정됐고 민병갈은 2006년 5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아래에는 "이 땅과 나무를 사랑한 민병갈 (중략) 국민에게 선물한 천리포 수목원은 우리나라 식물 자원의 보고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소중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일본군 포로 신문하다가 한국인에게 연민 품어 밀러는 1921년 12월 2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광산촌 피츠턴에서 2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15살 때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는 워싱턴DC 국방부로 취직해 생계비를 벌었고, 고모가 3남매를 보살폈다. 버크넬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정보학교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웠다. 이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군종 신부 출신의 교장 에드워드 배런 중령은 한국에서 10년 넘게 선교한 경험을 들려주며 "전쟁이 끝나고 점령지로 배속되면 일본 대신 한국 근무를 자원하라"고 권했다. 1944년 12월 중위로 임관한 뒤 이듬해 4월 오키나와로 투입돼 일본군 포로들을 신문했다. 징병으로 끌려온 한국인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연민을 품게 됐다. 말로만 듣던 종군위안부들도 만났다. 1945년 8월 종전 후 일본 부임 명령을 받았으나 사령부에 요청해 한국에 부임하기로 한 장교와 맞바꿨다. 1945년 9월부터 서울의 미 군정청에 근무하다가 이듬해 8월 전역과 함께 귀국했다. 하지만 "전생에 한국인이었을 것"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한국의 자연과 인심에 이끌려 5개월 뒤 군정청 직원으로 돌아왔다. 군정청에서 원한경(호러스 호턴 언더우드) 목사를 만나 친해졌다. 원 목사는 밀러를 기특하게 여겨 자신이 지은 한글 교본과 한국 관련 영어 논문 몇 편을 건네주고 아들 원일한(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Ⅱ)을 소개해줬다. 그때부터 밀러는 한국어와 한국 공부에 몰두했고 원일한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주말이면 차 몰고 시골 찾아 촌로들과 대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군정청이 해체된 뒤에도 밀러는 미국 경제협조처(ECA) 한국지부에 근무했다. 일과 후에는 한국어와 한문을 익히고 주말이면 차를 몰고 시골을 찾아 촌로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들도 우리말을 할 줄 알고 한문을 척척 읽는 서양인을 신기하게 여겨 대화를 즐겼다.붓글씨를 배우며 한국식 이름을 짓고 싶어 하다가 1952년 부산 피란 시절 민병갈이라고 정했다. ECA에 근무하며 의형제를 맺은 한국은행 간부 민병도의 성(민·閔)과 돌림자(병·丙)를 따고 본명의 '칼(Carl)'과 발음이 비슷한 '맑을 갈(㵧)'자를 붙인 것이다. 서예 스승 이건직에게 청해 '동방에 온 나그네'란 뜻의 '동여(東旅)'란 호를 받았다. 말년에는 수양딸 안선주 교무의 권유로 원불교에 입교해 임산(林山)이란 법호도 얻었다. 한옥 생활도 부산에서 시작했다. 자신이 미국 유학을 주선해 준 남포동 이기환의 방에서 지냈다. 서울로 올라온 뒤 북촌의 팔판동 대갓집 별채를 거쳐 독립문 근처 현저동의 한옥 독채에서 10년간 살았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에서도 한동안 거주했다. ECA 한국지부가 해체돼 유엔한국민사지원단(UNCACK)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54년 한국은행 상임고문으로 위촉됐다. 한국에 눌러앉기로 작정하자 마루와 안방을 전통 고가구와 서화로 꾸며놓고 한복 차림으로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해 한식을 대접했다. 왕립아시아학회(RAS) 회장도 맡아 외국인 대상으로 한국 역사·문화 강좌를 열고 버스를 빌려 전국의 명승고적으로 답사 여행을 다녔다. 한국 사람을 닮으려다가 훨씬 더 한국인답게 살고 한국을 널리 알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1961년 3월 19일 자 동아일보는 '순한국 살림하는 이방인'이란 제목의 기사로 그의 생활상을 소개했다. '옷도 음식도 집도' '고전 취미까지 대단' "근대 빌딩은 싫어" 등의 부제만 봐도 그가 얼마나 순한국식으로 살고 토종 한국인처럼 생각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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