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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던 손병희도 정부의 이같은 처사에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최시형도 분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새로운 집회가 준비되었다. 1893년 4월 25일 충청북도 옥천 창성면 거포리에 있는 김연국의 집에서 수운 순도기념 제례를 지내면서 거사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최시형을 비롯하여 손병희·김연국·이관영·권재조·권병덕·임정훈·이원필·조재벽 등 청주·보은·옥천 지역에 사는 간부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는 동학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즉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는 것이 정의"라는 명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보은에 8도의 도인을 모아 서울에서 이루지 못한 교조신원운동을 재개하기로 하고, 여기서 결정한 <통유문>을 각지에 보내어 보은 장내리로 모이도록 하였다. 서울의 교조신원이 정부의 속임수로 무위에 그치고, 상경했던 도인들은 귀가하지도 못한데다 관헌들의 토색질이 더욱 심해진 상태에서 1893년 3월 중순 동학교인 2만여 명이 보은에 집결하였다. 손병희는 이 집회를 통해 확실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2만여 명에 달하는 교인(군중)들을 질서정연하게 관리하고 척왜척양의 역사의식을 동학정신으로 접목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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