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or
"분자요리는 방법일 뿐"... 신동민 셰프를 바꾼 그 사고 이후 | Collector 시즌2에서 그가 선보인 '–196도 사과' 디저트는 말대로 그의 작은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방송에선 액화질소 분자요리라는 특정 기술만 부각됐지만 그게 그를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서울 신사동의 디저트 카페 당옥에서 3월 26일 오후에 만난 신동민 셰프는 분자요리의 본질을 "재료 본연의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당옥 외에 그가 운영하는 식당인 멘야미코(삼성동)에서도 일본 가정식이 주메뉴다. 이제 그는 분자요리를 기술적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쿠킹(cooking) 자체가 어쩌면 분자요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는 게 지금 그의 지론이었다. 인생 분기점 됐던 불의의 사고 분자요리는 1980년대 후반 학술적 개념이 만들어졌고, 이후 스페인 셰프들을 중심으로 대중화 됐다. 2007년 보도된 <한겨레> 기사를 보면 당시에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면적이었다. 새로운 요리의 탄생이라는 것과 이탈리아나 프랑스 요리를 따라잡기 위해 스페인 정부가 고안해 낸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일본 유명 레스토랑 류긴에서 분자요리를 접하고, 2006년 12월경 서울 청담동에 슈밍화라는 레스토랑을 오픈, 국내 분자요리 초창기를 이끈 신동민 셰프의 인터뷰도 해당 기사에 짧게 담겨 있었다. 액화질소를 활용한 아이스크림, 솜사탕처럼 만들어 낸 물수건, 우엉을 활용한 와인 코르크 등. 신나게 설명하던 당시 신동민 셰프의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 그에게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교통사고였다. "그때까진 상위 1%의 고객을 중심으로 일했다. 어느 순간 그게 재미없더라. 남은 제 인생을 돈 많은 분들을 위해 요리하는 데 쓸 자신이 없었다. 당시 코스를 열두 가지 요리로 구성했는데 그걸 매월 새롭게 변경하며 일했거든. 새벽 3시, 4시경 귀가하기 일쑤였다. 집에 못 들어가고 차 안에서 자다가 출근한 적도 많았다. 사촌 형이 깨우러 와서 제발 들어가서 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시속 70km로 달리다 사고가 나서 입원했는데 병원에서 나도 모르게 뭔가 미소가 나오더라.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때가 2007년 11월 14일 새벽 4시였다. 서른 살이었으니 정말 어린 나이였지. 온몸이 굳었고, 몇 달을 고생했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 중이긴 하다. 2008년에 슈밍화를 폐업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치료받으면서 재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소금, 간장, 된장부터 팠다. 그러다 각종 약선(약재 조리 음식)들도 들여다봤고, 한국의 흑초도 찾아내게 됐다. 당시에 방송 출연 제의가 많았는데 다 거절했다. 대신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농민분을 만났다. 그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체 내용보기"> 시즌2에서 그가 선보인 '–196도 사과' 디저트는 말대로 그의 작은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방송에선 액화질소 분자요리라는 특정 기술만 부각됐지만 그게 그를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서울 신사동의 디저트 카페 당옥에서 3월 26일 오후에 만난 신동민 셰프는 분자요리의 본질을 "재료 본연의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당옥 외에 그가 운영하는 식당인 멘야미코(삼성동)에서도 일본 가정식이 주메뉴다. 이제 그는 분자요리를 기술적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쿠킹(cooking) 자체가 어쩌면 분자요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는 게 지금 그의 지론이었다. 인생 분기점 됐던 불의의 사고 분자요리는 1980년대 후반 학술적 개념이 만들어졌고, 이후 스페인 셰프들을 중심으로 대중화 됐다. 2007년 보도된 <한겨레> 기사를 보면 당시에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면적이었다. 새로운 요리의 탄생이라는 것과 이탈리아나 프랑스 요리를 따라잡기 위해 스페인 정부가 고안해 낸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일본 유명 레스토랑 류긴에서 분자요리를 접하고, 2006년 12월경 서울 청담동에 슈밍화라는 레스토랑을 오픈, 국내 분자요리 초창기를 이끈 신동민 셰프의 인터뷰도 해당 기사에 짧게 담겨 있었다. 액화질소를 활용한 아이스크림, 솜사탕처럼 만들어 낸 물수건, 우엉을 활용한 와인 코르크 등. 신나게 설명하던 당시 신동민 셰프의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 그에게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교통사고였다. "그때까진 상위 1%의 고객을 중심으로 일했다. 어느 순간 그게 재미없더라. 남은 제 인생을 돈 많은 분들을 위해 요리하는 데 쓸 자신이 없었다. 당시 코스를 열두 가지 요리로 구성했는데 그걸 매월 새롭게 변경하며 일했거든. 새벽 3시, 4시경 귀가하기 일쑤였다. 집에 못 들어가고 차 안에서 자다가 출근한 적도 많았다. 사촌 형이 깨우러 와서 제발 들어가서 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시속 70km로 달리다 사고가 나서 입원했는데 병원에서 나도 모르게 뭔가 미소가 나오더라.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때가 2007년 11월 14일 새벽 4시였다. 서른 살이었으니 정말 어린 나이였지. 온몸이 굳었고, 몇 달을 고생했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 중이긴 하다. 2008년에 슈밍화를 폐업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치료받으면서 재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소금, 간장, 된장부터 팠다. 그러다 각종 약선(약재 조리 음식)들도 들여다봤고, 한국의 흑초도 찾아내게 됐다. 당시에 방송 출연 제의가 많았는데 다 거절했다. 대신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농민분을 만났다. 그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체 내용보기"> 시즌2에서 그가 선보인 '–196도 사과' 디저트는 말대로 그의 작은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방송에선 액화질소 분자요리라는 특정 기술만 부각됐지만 그게 그를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서울 신사동의 디저트 카페 당옥에서 3월 26일 오후에 만난 신동민 셰프는 분자요리의 본질을 "재료 본연의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당옥 외에 그가 운영하는 식당인 멘야미코(삼성동)에서도 일본 가정식이 주메뉴다. 이제 그는 분자요리를 기술적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쿠킹(cooking) 자체가 어쩌면 분자요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는 게 지금 그의 지론이었다. 인생 분기점 됐던 불의의 사고 분자요리는 1980년대 후반 학술적 개념이 만들어졌고, 이후 스페인 셰프들을 중심으로 대중화 됐다. 2007년 보도된 <한겨레> 기사를 보면 당시에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면적이었다. 새로운 요리의 탄생이라는 것과 이탈리아나 프랑스 요리를 따라잡기 위해 스페인 정부가 고안해 낸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일본 유명 레스토랑 류긴에서 분자요리를 접하고, 2006년 12월경 서울 청담동에 슈밍화라는 레스토랑을 오픈, 국내 분자요리 초창기를 이끈 신동민 셰프의 인터뷰도 해당 기사에 짧게 담겨 있었다. 액화질소를 활용한 아이스크림, 솜사탕처럼 만들어 낸 물수건, 우엉을 활용한 와인 코르크 등. 신나게 설명하던 당시 신동민 셰프의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 그에게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교통사고였다. "그때까진 상위 1%의 고객을 중심으로 일했다. 어느 순간 그게 재미없더라. 남은 제 인생을 돈 많은 분들을 위해 요리하는 데 쓸 자신이 없었다. 당시 코스를 열두 가지 요리로 구성했는데 그걸 매월 새롭게 변경하며 일했거든. 새벽 3시, 4시경 귀가하기 일쑤였다. 집에 못 들어가고 차 안에서 자다가 출근한 적도 많았다. 사촌 형이 깨우러 와서 제발 들어가서 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시속 70km로 달리다 사고가 나서 입원했는데 병원에서 나도 모르게 뭔가 미소가 나오더라.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때가 2007년 11월 14일 새벽 4시였다. 서른 살이었으니 정말 어린 나이였지. 온몸이 굳었고, 몇 달을 고생했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 중이긴 하다. 2008년에 슈밍화를 폐업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치료받으면서 재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소금, 간장, 된장부터 팠다. 그러다 각종 약선(약재 조리 음식)들도 들여다봤고, 한국의 흑초도 찾아내게 됐다. 당시에 방송 출연 제의가 많았는데 다 거절했다. 대신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농민분을 만났다. 그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체 내용보기">
오마이뉴스

"분자요리는 방법일 뿐"... 신동민 셰프를 바꾼 그 사고 이후

* 신동민 셰프 인터뷰 '안성재의 올드하다 심사평, 방송 못 나간 요리과학자의 이 말'에서 이어집니다. "가쓰오부시는 85도, 다시마는 60도 정도의 물에서 가장 깊은 맛을 낸다. (중략) 설탕은 살을 찌우고, 소금은 맥을 뛰게 하며, 신맛은 뼈를 튼튼하게, 쓴맛은 기를 북돋운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신동민 셰프가 종종 강조하는 말이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그가 선보인 '–196도 사과' 디저트는 말대로 그의 작은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방송에선 액화질소 분자요리라는 특정 기술만 부각됐지만 그게 그를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서울 신사동의 디저트 카페 당옥에서 3월 26일 오후에 만난 신동민 셰프는 분자요리의 본질을 "재료 본연의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당옥 외에 그가 운영하는 식당인 멘야미코(삼성동)에서도 일본 가정식이 주메뉴다. 이제 그는 분자요리를 기술적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쿠킹(cooking) 자체가 어쩌면 분자요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는 게 지금 그의 지론이었다. 인생 분기점 됐던 불의의 사고 분자요리는 1980년대 후반 학술적 개념이 만들어졌고, 이후 스페인 셰프들을 중심으로 대중화 됐다. 2007년 보도된 <한겨레> 기사를 보면 당시에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면적이었다. 새로운 요리의 탄생이라는 것과 이탈리아나 프랑스 요리를 따라잡기 위해 스페인 정부가 고안해 낸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일본 유명 레스토랑 류긴에서 분자요리를 접하고, 2006년 12월경 서울 청담동에 슈밍화라는 레스토랑을 오픈, 국내 분자요리 초창기를 이끈 신동민 셰프의 인터뷰도 해당 기사에 짧게 담겨 있었다. 액화질소를 활용한 아이스크림, 솜사탕처럼 만들어 낸 물수건, 우엉을 활용한 와인 코르크 등. 신나게 설명하던 당시 신동민 셰프의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 그에게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교통사고였다. "그때까진 상위 1%의 고객을 중심으로 일했다. 어느 순간 그게 재미없더라. 남은 제 인생을 돈 많은 분들을 위해 요리하는 데 쓸 자신이 없었다. 당시 코스를 열두 가지 요리로 구성했는데 그걸 매월 새롭게 변경하며 일했거든. 새벽 3시, 4시경 귀가하기 일쑤였다. 집에 못 들어가고 차 안에서 자다가 출근한 적도 많았다. 사촌 형이 깨우러 와서 제발 들어가서 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시속 70km로 달리다 사고가 나서 입원했는데 병원에서 나도 모르게 뭔가 미소가 나오더라.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때가 2007년 11월 14일 새벽 4시였다. 서른 살이었으니 정말 어린 나이였지. 온몸이 굳었고, 몇 달을 고생했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 중이긴 하다. 2008년에 슈밍화를 폐업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치료받으면서 재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소금, 간장, 된장부터 팠다. 그러다 각종 약선(약재 조리 음식)들도 들여다봤고, 한국의 흑초도 찾아내게 됐다. 당시에 방송 출연 제의가 많았는데 다 거절했다. 대신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농민분을 만났다. 그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체 내용보기

Go to News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