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5년 전이었다. 베이비박스를 취재하다 처음으로 아동복지심의위원회라는 이름을 만났다. 부모로부터 양육이 포기된 보호아동의 보호조치를 결정하는 공적위원회였다. 2012년부터 전국 지자체별로 운영되고 있었다.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2012년 이전 보호아동의 보호조치는 누가 어떻게 결정했는가, 그래서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 위원회는 제 역할을 해오고 있는가, 가정보호가 시설보호를 압도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가 혹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관련된 모든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제1기(~2011)] 기준도, 회의도, 기록도 없었다 1953년 휴전 직후 전국에는 440개의 고아원이 있었다. 그 안에 5만 3964명의 아이가 있었다. 전쟁이 만든 숫자였다. 다만 이는 공식 통계일 뿐 거리를 떠도는 부랑아들을 포함한 비공식 통계는 10만 명 이상을 추산했다. 당시 국가는 외국 원조에 기대 살았다. 아이들은 민간이나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시설이 유일한 보호소였다. 보호아동을 가정이나 시설 중 어디로 보낼지를 결정하는 공적기구는 없었다. 그냥 시설이 있었고 아이가 들어갔다. 이 구조는 60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 시설중심의 보호체계가 구석구석 뿌리를 뻗었다. 아이들은 국가의 안중에 없었다. 1961년 제정된 아동복리법이 1981년 아동복지법으로 이름을 바꿨다. 아동에 대한 선별적 복지를 모든 아동에 대한 보편적 복지로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된 기점이었다. 하지만 누가, 어떤 기준으로, 아이의 보호 방식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법은 답하지 않았다. 아이가 발생하면 읍면동 공무원이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 전화 몇 통을 돌려 빈자리가 있는 시설로 보냈다. 그걸로 끝이었다. 2003년 가정위탁제도가 시범 도입됐다. 도입은 됐는데 위탁가정이 생기지 않았다. 남의 아이를 내 집에서 키운다는 것 자체가 낯선 문화였다. 양육보조금은 (현재 기준) 월 30~50만 원이 권고 기준이었다. 법적으로 위탁부모는 아이의 보호자가 아닌 동거인이었다. 아이와 병원에 갈 때마다 서류를 챙겨야 했다. 사고가 나면 책임은 고스란히 개인 몫이었다. 위탁가정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국가는 제도를 만들어만 놓았지 운영은 개인의 선의에 의탁했다. 사실상 방기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박세경 외, 2005)는 그해 가정위탁 실적이 381명이었다고 적었다. 전국 보호대상아동은 9420명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22년 기준 전국 위탁가정 8367가구 중 비혈연 위탁가구는 975가구, 11.7%다(보건복지부, 2022년 보호대상아동 현황보고서). 나머지 88.3%는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 등의 혈연가구다. 국가는 20년 동안 가정위탁 문화를 외면했다. 2022년 아동양육시설에는 9513명의 아동이 집단생활 환경 속에 자라고 있었다. [제2기(2012~2020)] 법은 있으나 회의는 없었다 2012년 8월 아동복지법이 전부 개정됐다. 핵심은 아동복지심의위원회 설치였다. 보호아동을 시설에 보낼지 가정에 보낼지에 대한 결정을 전문가들이 모여 심의하게 했다. 보호조치, 퇴소, 원가정 복귀, 친권 제한, 위탁, 입양 등 모두 이 위원회를 거쳐야 했다. 그런데 위원회가 열리지 않았다. 2022년 전국 243개 지자체 중 연 4회 이상 위원회를 연 곳은 8개, 3%였다. 한 번도 열지 않은 곳이 114개였다(보건복지부, 제16차 아동정책조정위원회 회의자료).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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