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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가 무장의 당산마을 앞 들판을 제1차 기포 장소로 택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 무장 대접주 손화중의 포가 그 규모면에서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당시 그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는 3천 명에 이르렀으며, 이미 1년 전의 보은취회 때 손화중은 독자적으로 호남의 동학도를 모았던 금구취당의 두목이었다. 따라서 무장에 도소를 설치하면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대규모 동학조직의 세력을 도소의 휘하에 둘 수 있었다. 2. 전봉준과 손화중의 절친한 친분과 동지적 결합관계 때문이었다. 손화중은 전봉준보다 6년 연상이었으나 전봉준이 학식과 지략의 면에서 탁월했기 때문에 손화중은 대접주 이면서도 전봉준을 자기의 윗자리에 받아들였다. 3. 무장이 지리적으로 고부에 비교적 가까운 동학조직의 거점이었다.(신용하, '고부민란의 사발통문',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무장에 집결한 농민혁명군은 <동도대장>의 대기(大旗)를 앞세우고 각기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의 5색기로 그 표식을 삼아 대오를 정비하였다. 실제적으로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군이 결행되는 순간이었다. 지도부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혁명의 당위를 설명하고, 이번 거사의 대의(大義)를 4개항의 행동강령으로 집약하여 선포하였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라. 2.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하라. 3. 일본 오랑캐(倭夷)를 축멸하여 성도(聖道)를 깨끗이 하라. 4. 병(兵)을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하라. 3월 21일을 동학농민혁명의 봉기일로 정한 것은 이 날이 동학 2대 교조 최시형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동학교도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2대 교조 탄일을 거사일로 택한 것이다. 이날 무장에 집결한 군중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봉기군측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봉준은 '공초'에서 4,000여 명이라 밝혔고, 지방관청의 보고에도 수천 명으로 기록되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하면 8,000여 명이 정확한 것 같다. 부안현이 전라감사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4일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금구·원평으로부터 몰려와 부흥역에 있는 부대와 합세하여 동헌(東軒)으로 돌입, 현감 이철화를 감금하고 아리(衙吏)들을 결박한 다음 군기(軍器)를 탈취해가지고 6일 그들이 도교산 (현 정읍시 덕천면)으로 이동해 간 틈에 간신히 풀려나왔다고 하였다.(최현식, 앞의 책)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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