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마침내 3월 21일, 진군의 나팔이 울렸다. 이제 전봉준의 준엄한 목소리는 산천을 울렸고 농민군의 함성은 조선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런데 이 무렵 감사 김문현과 안핵사 이용태와 각지의 수령들은 전주의 한벽루에 모여 기생을 끼고 풍악을 울리며 질탕하게 놀고 있었다. 고부의 난민이 여늬 민란떼와 같이 곧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이들 봉건지배자들은 우리의 민중을 너무 깔보고 있었던 것이다.(이이화, <녹두 전봉준>) 민중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분노하면 배를 뒤엎기도 한다. 호남의 민중들은 농민을 착취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지배세력을 뒤엎고자 봉기에 나섰다. 생명을 건 도박이었고 패배하면 역적이 되는 '운명의 반역'을 꾀한 것이다. 3월 23일 농민군 3,000여 명은 창과 칼, 또는 죽창을 들고 향교와 각 관청을 습격했다. 고부는 난민들에 의해 무정부상태에 들어갔다. 농민군은 흰 무명으로 머리띠를 매고 길이 5척이 넘는 죽창을 지녔다. 이들은 굴치(屈峙)를 넘어 흥덕을 지나 일부는 정읍을 거쳐 고부로 향하고 일부는 줄포로 진출했다. 이들이 이러한 우회로를 잡은 것은 정읍 인근 지역에 봉기를 전하고 동참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신복룡, 앞의 책) 이때 부안과 태인 지역에서도 무장에서처럼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군중의 수가 급속히 늘어나면서백산에는 무장·고창·부안·정읍·태인·흥덕·금구·김제지역에서모여든 농민군 1만여 명이 군사대오를 형성하고, 지휘부의 명령으로 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이 타올랐다. 혁명군의 진군 소식에 관리들은 줄행랑을 치고 농민들은 환호하면서 혁명대열에 참여하였다. 전라도 지역은 점차 해방구가 되고 관리들은 손을 놓고 불안에 떨었다. 3월 20일 이후 고부에서 시작하여 태인, 흥덕, 고창, 금구, 부안, 김제, 무장을 차례로 침범하였는데, 이곳을 지키던 수령들은 모두 달아났고 아전과 군교들도 뒤따라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적은 나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미 고을이 텅 비어버렸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먹을 것과 짚신을 요구할 뿐 부녀자와 재물을 약탈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 적의 기세가 점점 커졌다. 금산군의 보고에 의하면, 이달 12일 동학무리 수천 명이 짧은 몽둥이를 들고 흰 두건을 머리에 쓰고서 군에 모여들어 구실아치들의 집을 불태웠다고 한다. 고부군의 보고에 의하면, 이달 23일 동학무리 3천여 명이 어떤 자는 창, 칼을 잡고, 어떤 자는 죽창을 들고 총을 쏘면서 밀고 들어와 향교와 각 관아 건물에 분산하여 주둔하였다고 한다. 흥덕현의 보고에 의하면, 동학무리 3천여 명이 고창으로부터 흥덕으로 옮겨와 주둔하고 있는데, 장차 부안으로 향할 것이라고 하였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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