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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 45] 동학농민군 사기충천 | Collector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 45] 동학농민군 사기충천
오마이뉴스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 45] 동학농민군 사기충천

동학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고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초토사 홍계훈의 방문 따위에 겁을 먹거나 '회개'하여 전선을 떠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9일이 되어서야 경병 160명과 향병 200명을 금구와 태인으로 투입하고, 14일에는 선발대 2대를 무장으로 내려 보냈다. 이런 정도의 군사로는 1만에 가까운 농민군을 대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라병사 이문영이 전라좌우도에 징병령을 내려 군사의 모집에 나섰다. 징병령은 소연한 민심을 더욱 어지럽혔을 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간신히 끌어 모은 장병의 수는 몇 백 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을 각 고을관아에 배치했지만, 강제로 끌여 온 농민들이 관복을 입고 관군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춘향이 노릇이었다. 숫적으로도 중과부적이었다. 장성의 황룡촌에서 다시 한번 접전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 큰 전투이다. 전봉준은 4월 21일 군사를 이끌고 장성 황룡촌에 이르러 월평 삼봉(三峰)에서 진을 쳤다. 이를 정탐한 홍계훈은 다음날인 4월 22일 관군 300명을 동원하여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날 오전 동학농민군 4~5천 명이 황룡촌에 집결하여 점심식사 중인 것을 탐지한 관군이 대포 2문으로써 포격을 가하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관군이 먼저 공격한 것이다. 관군은 숫적으로 열세이지만 대환포를 쏘면서 농민군의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황토현에서 이미 관군의 역량을 시험해 온 농민군은 관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때의 농민군의 행렬을 일본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동학당의 실력을 살펴 보건데 4천명, 그 가운데 2천명은 화승총을 가졌고, 기병 1백 명은 2열로 나뉘어 수색에 종사하고 있다. 그 동작은 양식조련과 닮아 지방민을 감복케 하였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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