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2006년, 한국 시민사회에 낯선 실험 하나가 등장했다. 시민이 일상에서 느낀 불편을 직접 정책 대안으로 바꿔보자는 것. 희망제작소가 내건 '시민창안'이었다. ATM 수수료 사전 안내, 임산부 배지, 여성 수영장 생리할인제도.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시민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당시 이런 일을 하는 곳은 없었다. 희망제작소는 스스로를 '21세기 실학 운동'이라 불렀다. 시민창안대회를 열고, 일상의 불편을 노래로 표현하는 '불만합창단'을 만들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았다. 국회의원을 찾아가 법안 발의를 설득하는 '호민관 클럽', 기초지자체장들이 당파를 넘어 혁신 정책을 공유하는 '목민관 클럽'도 만들었다. 시민의 아이디어가 실제 변화로 이어지는 통로를 설계한 것이다. 육아휴직 시 건강보험료 산정 현실화는 이 과정을 거쳐 실제 법안으로 발의됐다. 완주군 커뮤니티비즈니스 사례는 행안부 마을기업으로 확산됐고, 서울 노원구나 서대문구에서 시작된 동복지허브화는 중앙정부 정책으로 채택돼 복지행정을 현장중심으로 혁신했다. 한국 사회에 없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그로부터 20년, 희망제작소가 주창했던 시민 참여 방식은 사회 각계에서 이미 보편화됐다. 많은 지자체가 리빙랩을 운영하고, 서비스 디자인 방법론을 도입하며, 시민 창안대회를 연다. 그렇다면 시민 중심의 사회혁신은 완성된 것일까? 2024년부터 희망제작소를 이끌고 있는 이은경 소장은 "여전히 희망제작소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과거와 다른 사회적 상황에서 희망제작소의 역할 정립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이 소장은 2023년 희망제작소 연구위원으로 일하는 동안 '사회혁신, 비판적 성찰과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미디어 전공자로서 사회혁신이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현 시점 그의 무게중심은 '생태계 설계자'로의 역할 전환에 있다. 지난 6일 이은경 소장을 만나 희망제작소의 지난 2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시민 참여, 형식을 넘어 진짜 변화를 만드는 게 중요 이은경 소장은 희망제작소가 탄생한 2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2006년처럼 '아무도 하는 곳이 없어서 우리가 해야겠다, 이게 어떤 건지 보여줘야겠다.' 그런 시기는 지나갔죠. 저희 말고도 더 정교한 서비스 디자인 방법론을 가르치고, 더 좋은 도구로 확산하는 곳들이 많이 있어요." 하지만 시민창안이 제대로 확산됐느냐는 별개의 질문이다. 이 소장은 "그 부분은 다시 물음표를 찍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들이 워크숍 피로감이 대단하다는 얘기를 해요. 무언가를 결정할 때 형식적 협치를 맞추려고 어떻게든 시민들을 불러 모아 의견을 내라 하고, 제안을 하라 하는데, 실제로 그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잘 갖춰져 있느냐는 것이죠." 형식은 갖춰졌지만 실질이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희망제작소에도 전환점이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위기와 안전을 대하는 사회적 시스템, 시민의 태도까지 확장되는 문제였다. 이 소장은 "아이디어 제안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성찰의 도구로서 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시민 숙의형 토론 프로그램 '노란 테이블'이다. 이 소장은 "숙의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제시하기보다는, 우선 테이블을 펼쳐놓고 얘기하면서 그 숙의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분위기 조성에 가장 적합한) 노란 테이블 천을 구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고도 했다. 이 소장은 시민 제안과 민원은 동전의 양면 같다고 했다. 둘 다 각자 개인이 삶의 피부로 느끼는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나 안전 같은 의제는 당장 내 일상에 밀접하지 않더라도 한 번 어긋나면 큰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공론의 문제다. "숙의는 나를 둘러싼 훨씬 더 큰 사회의 구조를 들여다보게 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이 이 소장의 설명이다. 노란 테이블을 통해 숙의형 토론 문화와 도구가 시민 제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측면이 있다고 그는 평가했다. 결국 이 소장이 짚는 핵심은 아이디어 발현 이후의 과정이다. "시민이 창안한 아이디어가 실제 정책과 사회 변화로 연결되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임산부 배지를 도입하려면 보건복지부의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제도화할 수 있는지, 정책을 바꿀 수 있는 담당자와 계속 협의하는 과정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아이디어를 내신 분이 직접적인 변화를 체감할 수 있잖아요."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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