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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종교에 전 재산을 헌납하는 일은 대개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심려를 끼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살린 사례도 있다. 서른 살 된 전직 교사인 단애 윤세복이 1911년에 전 재산을 정리하고 신흥종교에 투신한 일은 그 자신과 종교는 물론이고 민족까지 살리는 길이 됐다. 국가보훈부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8권: 문화투쟁사>의 한 대목이다. "경상남도 밀양이 고향인 윤단애는 일찍부터 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지 못하여 고심하던 중, 경술국치 직후 서울에서 대종교의 도사교 나홍암을 만나 역사·종교·시국 등에 관한 담화를 들은 다음에는 개연히 깨닫고 느낀 바 있어 곧 입교하여 시교(施敎)의 임무를 맡게 되었으며, 본명 세린(世麟)을 세복(世福)으로 고치고 아호 단애(檀崖)를 쓰게 된 것이 모두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살 길이 숭조보국(崇祖報國)의 정신과 사상으로 서로 협동하는 데 있다고 명심한 단애는 30세 되는 이듬해 봄에 곧 가산을 정리하여 가지고 만주로 건너가 환인현에 자리를 잡고 포교와 독립운동을 병행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멸망 직후에 대종교 도사교(교주)인 홍암 나철의 강론을 듣고 포교 임무를 부여받은 윤세복은 '나라를 되찾자면 나라의 시조인 단군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라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런 확신하에 그는 재산을 과감히 정리했다. 그 재산은 대지주 반열에 드는 규모였다. 윤세복이 전 재산을 정리한 까닭 국학연구원이 발행한 <선도문화> 2010년 제8권에 실린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의 논문 '단애 윤세복의 민족학교 설립 일(一)고찰'은 "윤세복은 남만주(서간도) 시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가산 수만 석을 정리하여 즉시 출장을 떠났다"라고 기술한다. 전 재산을 정리하고 망명을 떠나는 그의 태도는 비장했다. 이것은 가족을 두고 홀로 떠나는 출장 형식의 망명이었다. 위 논문은 "후일 홍선·난악 남매는 모친을 여의고, 만주 무송현에 있는 부친을 찾아갔다"라고 알려준다. 이처럼 모진 마음으로 재산을 정리한 일은 그가 대종교를 기반으로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출발점이 됐다. 독립운동 역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분야는 여성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무정부주의운동과 더불어 대종교 운동이다. 특히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국내 항일투쟁의 주류를 이뤘는데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고, 대종교 운동은 종교와 항일이 거의 일체화된 특별한 운동인데도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윤세복은 그런 대종교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수여된 것은 건국훈장 3등급인 독립장이다. 훈장 등급이 다는 아니지만,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대종교 최고지도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당한 등급은 아니다. 만주로 망명한 전직 교사 윤세복은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 사업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뿌리와 역사를 기억하며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지적 기반을 갖추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여러 곳에 순차적으로 학교를 세웠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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