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스물여섯 살 된 김대중은 한국전쟁 때 집단학살 피해자가 될 뻔했다. 그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과의 대담록인 <김대중 회고록>에서 "우리 집은 장인, 나, 동생까지 3명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어요"라며 그때의 악몽을 떠올렸다. 전남에서 두세 번째 가는 대형 인쇄소 사업가인 장인은 우파로 분류돼 처형장으로 끌려갔다가 총소리에 기절해 쓰러졌다. 일일이 확인 사살을 하던 인민군은 멀쩡히 누워 있는 그를 내려다보더니, 욕설을 하면서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인민군은 자리를 옮겼고, 총알은 장인의 귀 옆에 꽂혔다. 김대중과 동생 김대의(해군 방첩대 문관)도 우파로 분류돼 체포됐다. 이들은 1950년 9·28 서울 수복 직후에 총살을 기다리다가 대기 순번이 늦어 목숨을 구했다. 처형 도중에 인민군이 사라진 뒤 목포형무소로 복귀한 두 형제는 분위기가 바뀐 틈을 타서 옥문을 부수고 탈출했다. 김대중은 왜 이승만을 증오하게 되었나 그런데 인민군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긴 김대중이 그 뒤 증오하게 된 대상은 이승만이다. 이 증오는 김대중이 정치에 뛰어드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남한 사람들을 죽이는 북한 정권에도 분노했지만, 남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죽게 만드는 남한 정권에 더 분노했다. 2024년에 발행된 위 회고록에서 그는 정계 입문 동기를 이렇게 언급했다. 아래의 "그 전부터"는 1952년 이전부터다. "나는 그 전부터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국민방위군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청년이 죽었습니까? 이 사람들을 위한 국고와 군수품을 횡령하고 빼돌려서 아까운 우리의 청년들이 길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그랬어요.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거창양민학살 사건에서도 아무런 잘못 없는 우리 국민이 공비로 몰려서 비참하게 학살당했어요. 아무리 전쟁통이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법도 없고 상식도 없는 그야말로 야만적인 시대였습니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3월 15일 편성된 청년방위대의 후신이다. 국군과 별도로 조직된 청년방위대는 이승만의 사병부대였다. <역사학연구> 2021년 제82집에 실린 유상수 순천대 교수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사적 통치기반 형성과 변화'는 "반대세력의 간섭에서 최대한 벗어나 자신의 대표적인 통치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평한다. 그렇게 조직된 국민방위군의 병사들은 간부들의 보급품 횡령 때문에 1951년 상반기에 일대 수난을 겪었다. 한미연합군 대 북중연합군의 공방전이 치열한 가운데 1·4 후퇴와 서울 재탈환(3.4) 등이 있었던 이 시기에, 국민방위군 병사 9만여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대통령의 사병부대를 만들어 놓고 추운 겨울에 음식과 옷을 제대로 주지 않아 이런 비극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거창양민학살도 이 시기의 사건이다.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을 일망타진한다는 빌미로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주민 719명을 학살하고 가옥과 재산을 파괴했다. 이 만행이 2월 9일에서 11일까지 자행됐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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