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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대신해 사과..." 46년 만에 인정받은 적법한 투쟁 | Collector 제1권에서도 확인된다. 10·26를 맞은 전두환은 그날 밤중에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합수부 설치를 건의했고,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 정승화는 흔쾌히 승낙했다가 12월 12일에 화를 입었다. 경호실장은 중앙정보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를 제칠 기회를 은밀히 모색하는 가운데, 치안본부가 중앙정보부를 무색게 만드는 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22년에 펴낸 보고서인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3차)>는 이상우의 <비록(秘錄) 박정희시대>와 한용원의 <한국의 군부정치>를 근거로 이런 설명을 한다. "모든 공안기관의 위에 군림하던 중앙정보부를 제치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남민전을 적발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에게는 김재규의 무능을 공격할 좋은 무기가 되었다.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남민전 사건이 권력 지형에까지 영향을 준 것은 이 사건이 어느 정도는 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공의 조직을 허구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실제 활동하는 조직을 크게 부풀린 것이기에, 내무부 장관이 치안본부장을 제치고 브리핑장에 나설 만도 했던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유신체제 극복 전체 내용보기"> 제1권에서도 확인된다. 10·26를 맞은 전두환은 그날 밤중에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합수부 설치를 건의했고,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 정승화는 흔쾌히 승낙했다가 12월 12일에 화를 입었다. 경호실장은 중앙정보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를 제칠 기회를 은밀히 모색하는 가운데, 치안본부가 중앙정보부를 무색게 만드는 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22년에 펴낸 보고서인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3차)>는 이상우의 <비록(秘錄) 박정희시대>와 한용원의 <한국의 군부정치>를 근거로 이런 설명을 한다. "모든 공안기관의 위에 군림하던 중앙정보부를 제치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남민전을 적발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에게는 김재규의 무능을 공격할 좋은 무기가 되었다.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남민전 사건이 권력 지형에까지 영향을 준 것은 이 사건이 어느 정도는 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공의 조직을 허구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실제 활동하는 조직을 크게 부풀린 것이기에, 내무부 장관이 치안본부장을 제치고 브리핑장에 나설 만도 했던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유신체제 극복 전체 내용보기"> 제1권에서도 확인된다. 10·26를 맞은 전두환은 그날 밤중에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합수부 설치를 건의했고,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 정승화는 흔쾌히 승낙했다가 12월 12일에 화를 입었다. 경호실장은 중앙정보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를 제칠 기회를 은밀히 모색하는 가운데, 치안본부가 중앙정보부를 무색게 만드는 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22년에 펴낸 보고서인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3차)>는 이상우의 <비록(秘錄) 박정희시대>와 한용원의 <한국의 군부정치>를 근거로 이런 설명을 한다. "모든 공안기관의 위에 군림하던 중앙정보부를 제치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남민전을 적발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에게는 김재규의 무능을 공격할 좋은 무기가 되었다.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남민전 사건이 권력 지형에까지 영향을 준 것은 이 사건이 어느 정도는 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공의 조직을 허구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실제 활동하는 조직을 크게 부풀린 것이기에, 내무부 장관이 치안본부장을 제치고 브리핑장에 나설 만도 했던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유신체제 극복 전체 내용보기">
오마이뉴스

"사법부 대신해 사과..." 46년 만에 인정받은 적법한 투쟁

유신체제 몰락에는 중앙정보부와 대통령경호실의 경쟁도 크게 작용했다. 이 경쟁에서 뒤처지는 상황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10·26 거사에 영향을 줬다. 그런데 김재규가 차지철에게만 밀렸던 것은 아니다. 5·16 쿠데타 주역 중 하나인 구자춘(1932~1996) 내무장관에도 밀릴지 모르는 상황이 조성돼 있었다. 10·26 사태 17일 전인 1979년 10월 9일, 구자춘은 치안본부가 수사한 결과를 언론에 직접 발표했다. 장관이 직접 나설 만큼 사안이 중대하다고 비쳐졌던 것이다. 그날의 <경향신문> 톱기사다. "구자춘 내무부장관은 9일 북괴의 대남기본전략인 폭력에 의한 적화통일 혁명노선에 따라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위해 학생·지식인 및 긴급조치 위반 수형자들을 포섭, 대정부투쟁을 선동·조종하며 도시 게릴라 방법에 의한 납치·강도 등으로 학원 및 사회 혼란을 조성, 민중봉기에 의한 국가변란을 기도해오던 반국가단체인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적발, 일당 74명 중 20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및 간첩 혐의로 검거하고 54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내무장관이 자신 있게 브리핑할 만큼의 대형 사건이 중앙정보부가 아닌 치안본부에 의해 발표됐다. 가장 강력한 법적 권한과 정부 예산을 배경으로 공안사건을 주도하던 중앙정보부가 내무부와 치안본부에 밀리는 순간이었다. 중앙정보부에 밀리던 국군보안사령부도 그해 여름부터 '한 방'을 준비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국방부 계엄시행계획에 합동수사본부 설치의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뒤 '비상계엄이 발생하면 보안사가 합수부를 주도한다'는 목표하에 준비 작업을 벌였다. 이는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서도 확인된다. 10·26를 맞은 전두환은 그날 밤중에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합수부 설치를 건의했고,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 정승화는 흔쾌히 승낙했다가 12월 12일에 화를 입었다. 경호실장은 중앙정보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를 제칠 기회를 은밀히 모색하는 가운데, 치안본부가 중앙정보부를 무색게 만드는 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22년에 펴낸 보고서인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3차)>는 이상우의 <비록(秘錄) 박정희시대>와 한용원의 <한국의 군부정치>를 근거로 이런 설명을 한다. "모든 공안기관의 위에 군림하던 중앙정보부를 제치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남민전을 적발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에게는 김재규의 무능을 공격할 좋은 무기가 되었다.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남민전 사건이 권력 지형에까지 영향을 준 것은 이 사건이 어느 정도는 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공의 조직을 허구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실제 활동하는 조직을 크게 부풀린 것이기에, 내무부 장관이 치안본부장을 제치고 브리핑장에 나설 만도 했던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유신체제 극복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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