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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아들의 기도...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의 감동적인 답변 | Collector
3살 아들의 기도...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의 감동적인 답변
오마이뉴스

3살 아들의 기도...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의 감동적인 답변

우리 국민의 5퍼센트는 장애인이고, 매년 4월 20일은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기 위해 1981년부터 기념해 온 '장애인의 날'이다. 대학에 다닐 때였다. 졸업 전 거의 마지막 수업 시간이었는데 담당 교수님과 함께 시각 장애인 한 분이 강의실에 들어왔다. 그분은 시종일관 웃으셨고, 교수님은 그분을 소개했다. 우리 학과 선배인데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셨다는 얘기였지만, 사실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당시 나는 행정고시 2차 시험을 몇 주 앞두고 마음이 분주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아마 출석 일수를 채우러 수업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나는 미국 일리노이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다니던 한인 교회에 출석한 어느 날 신앙 간증이 있었다. 강사는 노스이스턴일리노이대학교 특수교육학과 교수였다. 간증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소개했다. 이분은 정상적인 시력을 갖고 양평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어린 시절 축구공에 눈을 맞아 서서히 실명이 되어갔다. 태어나 10여 년 동안 보이던 주변 풍경이 차츰차츰 희미해지더니 어느 순간 깜깜해졌다. 설상가상 부모가 돌아가셔서 고아 신세가 된 그는 서울맹아학교에 입학했다. 마침 봉사활동을 하러 온 대학생 누나를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녀의 도움으로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봉사활동 왔던 그 여대생과 결혼한 후, 선교단체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부인의 도움과 각고의 노력으로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 장애인 박사가 되었다. 꿈을 안고 귀국하였고,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강의실에서 후배들도 만났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자 몇 해 전 강의실에서 내가 보았던 시각 장애인이 바로 이분, 강영우 박사란 걸 깨달았다. 미국 박사의 취업이 어렵지 않던 시절이었으나 시각 장애인에게는 미국 박사학위도 통하지 않았던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이었다. 그를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다. 기독교 대학인 모교에서조차 외면받은 강영우 박사는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노스이스턴일리노이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고난은 나에게 고통이 아니라 축복" 이날 강 박사님은 대학 시절에 있었던 일화 하나를 들려주셨는데 나와 관련된 얘기였다. 입학하자마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여러 동아리에 지원서를 냈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장애인이란 게 이유였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 학생들의 모임인 '녹우회'라는 동아리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꾀를 냈다. 장애가 없는 친구와 함께 지원했다. 그러면 뽑아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동아리는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정기 모임을 하는 봉사동아리였다. 결과는 입회 거부였다. 장애인과 함께 다닌다는 이유로 친구까지 불합격이었다. 강영우를 거부한 동아리 '녹우회', 나는 대학 2학년 때 그 동아리의 회장을 지냈었다. 신앙 간증이 끝나고 나는 강영우 박사에게 인사를 했다. 대학 후배이고, 강의실에서 만났었고, 녹우회의 회장이었다는 얘기를 하니 너무나 반갑게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리고는 집 주소를 적어 주며 놀러 오라고 하셨다. 진심이 느껴지는 초대였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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