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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를 타고 흐르는 계피의 열기에 마음이 진정되는 차 | Collector
식도를 타고 흐르는 계피의 열기에 마음이 진정되는 차
오마이뉴스

식도를 타고 흐르는 계피의 열기에 마음이 진정되는 차

며칠째 멍하니 웅크리고 있거나 마지못해 움직이더라도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마주앉은 모니터 속 커서는 속절없이 깜빡이는데, 마음은 자꾸만 길을 잃고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맙니다.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 기약 없이 길어지는 기다림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답답해 숨을 고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저처럼,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막막함을 끌어안고 닫힌 문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대로 끝없는 심연까지 끌려 내려갈 수는 없었기에 억지로라도 마음에 제동을 걸어야 했습니다. 고심 끝에 고른 건 무이암차, 그중에서도 미뢰를 꾹 눌러줄 육계(肉桂)였습니다. 가라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싶을 떄 육계는 중국 무이산의 척박한 바위 계곡 아래에서 자라납니다. 사실 무이암차 중에서도 무이산 풍경구 중심부의 핵심 산지인 삼갱양간(三坑兩澗)에서 난 것만을 엄격하게 정암차(正岩茶)라 부르며 최고로 칩니다. 하지만 워낙 귀하고 고가라 일상에서 정암차를 마시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꺼내 든 찻잎 역시 그 귀한 정암급은 아닙니다. 그래도 정암의 경계 어디쯤에서 그 옹골찬 기운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육계 본연의 알싸하고 묵직한 특성을 훌륭하게 뿜어내는 녀석입니다. 개완에 찻잎을 넣고 끓는 물을 붓습니다. 메말랐던 잎들이 몸을 풀며 내쉬는 쏴아아, 그 작은 숨소리 위로 알싸하고 달콤한 계피 향이 살짝 피어오릅니다. 뒤이어 바위틈의 무기질과 구수한 장작 냄새가 섞여들며 방 안의 서늘하고 정체된 공기를 묵직하게 밀어내죠. 기분 좋은 꽃향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붉은 갈색으로 잘 우러난 찻물을 잔으로 옮기자, 수면 위로 물안개처럼 피어오른 수증기가 공기 흐름의 결을 따라 갈라집니다. 신비로운 움직임을 한동안 응시하다, 탄은 이정(灘隱 李霆)의 <삼청첩>(三淸帖)을 떠올렸습니다. 시대의 암담함을 캔버스 삼아 그린 그림 이정은 세종대왕의 고손자로, 왕실의 종친이자 당대 최고의 묵죽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화첩을 완성한 1594년은 임진왜란의 참상이 조선 땅을 휩쓸던 참담한 시기였습니다. 심지어 그 자신도 왜적의 칼에 맞아 생명과도 같은 오른팔을 잃을 뻔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죠. 그가 마주했을 신체적 고통과 시절의 절망은 얼마나 무겁고 아팠을까요. 하지만 화가는 붓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흰 종이 대신, 검게 물들여 빛을 모조리 흡수해버린 칠흑 같은 비단을 펼쳤습니다. 시대의 암담함을 캔버스 삼은 것이죠. 그리고 그 위에 변치 않는 영원의 상징인 금가루 물감(금니 金泥)으로 비바람을 뚫고 자라나는 꼿꼿한 대나무와 달빛 아래 핀 매화, 골짜기의 난초를 쳐냈습니다. 특히 오직 대나무의 모습으로 바람이 부는 날인지, 비가 내린 날인지, 어느 계절인지가 드러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힙니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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