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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놈 잡아라." 1946년 연초 벽두에 충북 청원군 오창에서 열린 집회에서 터진 구호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와 경찰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적색분자', '주의자(主意者)'라고 지칭하긴 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말은 낯선 단어였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로 한반도가 '반탁-총체적 지지'라는 논쟁으로 용광로처럼 되었을 때,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는 국민들의 귀에 익숙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라는 말은 매국노, 반역자라는 말로 등치되었다. 해방 후 한반도에 단일민족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미·소)과 국내 좌·우파는 생각을 달리했다. 결국 폭탄의 심지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였다. 1946년 2월 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발족하였다. 독립촉성국민회(아래 독촉국민회)였다. 독촉국민회는 충북 지역에서도 만들어졌다. 독촉국민회 초대 지부장은 구연직이 맡았다. 사무실은 본정 3정목 청주읍사무소 내의 공회당에 두었다. 구연직의 뒤를 이어 이명구, 장응두가 지부장을 맡았다(최병주, <충북인사론>, 1955). 독촉국민회 강령은 "민족을 총단결해 민주주의 원칙하에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자주독립국가 촉진 완성을 기함"으로 되어 있다. 최근에 발굴된 자료에는 독촉국민회 충북지부의 임원 명단이 상세히 적시되어 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청주지방법원 검사국,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 1946). 회장 구연직(현 제일교회 목사) / 부회장: 최영준 총무부장: 장응두 / 재무부장: 허식 / 조직부장: 박서원 / 선전부장: 홍순복 / 문교부장: 김영수 / 산업부장: 김적구 / 후생부장: 김명목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독촉국민회의 지부장과 주요 간부의 이력이다. 초대 지부장 구연직은 1938년에 청주제일교회 목사로 부임한 이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충청노회지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충청북도 발기인, 조선예수교장로회가 개편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충청교구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명구는 일제강점기 청주 지역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중추원 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을 지냈다. 반민족행위자였던 것이다. 또한 유념해야할 것은 독촉국민회 조직의 성격이다. 자신의 강령에 '민주주의 원칙하에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독촉국민회 회원들은 이러한 강령에 동의해 가입한 이들인가? 순수한 이념단체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번에 발굴된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청주지방법원 검사국,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 1946)에 의하면 독촉국민회 충북지부 회원은 30만 명이다. 1949년 당시 충청북도 인구는 114만 6509명이었다. 인구 2.6명 중 1명이 회원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 집에 최소 2명이 회원이라는 것이다. 과연 해방 후 남조선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독촉국민회에 적극적으로 가입했을까? 미군정과 경찰, 행정 조직이 총망라되어 성인 남성을 의무적으로 강제가입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독촉국민회는 순수한 정치단체가 아니라 반관(半官)단체였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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