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아재 셋이 모이면 평화로울까? 천만에, 겉으로는 "허허, 그래 잘됐네"하며 오랜만의 덕담을 나누지만, 테이블 밑에서는 소리 없는 이단옆차기가 날아다닌다. 누가 휴대폰 화면에 담긴 손주 자랑을 시작하면 속으론 '우리 애들은 뭐 하나' 싶어 입맛이 쓰고, 또 누가 가족들과 유럽 투어 다녀왔다며 "이거 봐, 니들도 스위스 가면 이 호텔에 묵어. 다른 데 보다 좋아"라며 휴대폰 사진을 들이밀면, 사실 노안으로 보이지도 않으면서도 대충 본 척하고, "그래 재밌었겠네" 예의 상 한마디 해준다. 속으론, 스위스는 고사하고 대마도라도 가봤음 좋겠다 하며. 평생을 등수와 직급에 매달려 살다 보니 은퇴 후에도 경쟁심은 사그라들지 않고, 나이 들어 넉넉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기심도 늘고 옹졸해진 느낌이다. 건강조차 경쟁이다. 누구 혈압이 더 낮은지, 누가 당뇨 약을 안 먹는지로 은근히 체력의 서열이 정해진다. 거기에 대고 마라톤 풀코스라도 뛰었다 하면 다들 '와아!' 하고 놀라면서도 누군가는 한마디 한다. "나이 들어 너무 뛰면 무릎에 안 좋대". 이쯤 되면 지혜로운 노년이라기보다, 장난감을 두고 싸우는 대여섯 살 꼬마들과 다름없다. 참 치사하다. 하지만 이 치사함이야말로 아직은 살아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욕망이 거세된 평화는 성자의 것이지, 아직 뜨거운 피가 흐른다고 주장하고 싶은 아재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즈 공연장에 가면 연주자들이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관객들은 저들이 고결한 예술적 영감을 나누며 황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 이면엔 팽팽한 '기싸움'이 흐른다. 피아노가 화려한 속주로 좌중을 흔들어 놓으면, 베이스는 '네가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라는 듯 더 묵직하고 복잡한 리듬으로 응수한다. 이것이 바로 '인터플레이(Interplay)', 즉 상호작용이다. 재즈에서의 인터플레이는 마냥 좋은 게 좋은 식의 협동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품격 있는 난투극'이라 하는 게 맞다. 동료의 연주에 자극받은 연주자가 '나도 너만큼, 아니 너보다 더 잘할 수 있어!'라는 치열한 질투와 경쟁심을 에너지 삼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솔로를 터뜨릴 때 명연주가 완성된다. 재즈 거장들의 인터플레이에는 '나도 좀 봐달라'는 인정 투쟁과 '내가 최고'라는 유치한 자부심도 섞여 있다. 만약 연주자들이 서로를 시기하지 않고 그저 예의 바르게 양보만 했다면, 재즈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의 질투가 멋진 연주로 승화 되듯이 우리 아재들의 일상을 이 인터플레이의 무대로 끌어올려 보면 어떨까. 친구의 잘 나가는 소식에 배가 아픈가? 그렇다면 그 배아픔을 '나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동력으로 바꿔보자. 저 친구가 저 나이에 히말라야를 간다면, 나는 내일 아침 동네 뒷산이라도 한 번 더 오르겠다는 '치사한 결기'를 부려보는 식이다. 남을 깎아내리는 질투는 독이 되지만, 나를 일으켜 세우는 질투는 훌륭한 삶의 동력이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장 우울할 때는 남과 비교해서 뒤처질 때가 아니라, 비교할 대상조차 없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혔다고 느낄 때다. 친구의 자랑질에 짜증이 난다는 건, 아직 당신 안에 그 에너지를 받아칠 '리듬'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너만 하냐, 나도 한다!"라는 그 유치한 반격이야말로 인생 후반전을 버티게 하는 가장 인간적인 생존 본능이다. 물론 그 끝은 재즈처럼 따뜻한 화합이어야 하겠지만. 무대 위에서 서로 잡아먹을 듯 소리로 싸우던 연주자들도 곡이 끝나면 땀을 닦으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린다. "오늘 네 연주 정말 독하더라, 덕분에 나도 간만에 신나게 불었어"라고 말하는 그 눈빛. 우리 아재들의 어울림도 그랬으면 좋겠다. 한바탕 '자랑 배틀'을 벌이고 질투 섞인 농담을 주고 받다가도, 헤어질 때는 "야, 그래도 네가 건강하니 내가 질투할 맛도 난다. 아프지 마라"라고 툭 던지는 그 한마디. 그 치사함과 따뜻함 사이의 절묘한 간격이 바로 우리가 완성해야 할 인생의 '인터플레이' 아닐까.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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