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노동운동가 이소선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는 전태일의 유언대로 인생 절반을 살았다. 아들 전태일이 분신 항거를 단행한 1970년 11월 13일로부터 82세 나이로 타계한 2011년 8월 3일까지의 41년 생애를 그는 아들의 유지를 지키는 데 바쳤다. 그런데 실은 이소선이 아들의 뜻대로 산 게 아니라 전태일이 어머니의 DNA대로 산 것이었다. 이소선에게 근로기준법을 학습시키고 그의 노동운동을 추동한 쪽은 아들 전태일이지만, 전태일이 노동 차별에 맞서고 평등 세상을 추구한 데는 어머니의 기질적 특성이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1929년 11월 3일에 폭발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때인 그해 12월 30일, 이소선은 경북 달성군 성서면에서 3남매 중의 막내로 출생했다. 소작농 부부인 김분이와 이성조가 그의 부모였다. 그의 아버지는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인물과사상> 2011년 10월호에 실린 최을영 작가의 '이소선: 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는 "소작농이던 아버지는 농민들을 모아 소작료를 내리라는 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순사에게 잡혀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것"이라고 서술한다. 일제가 개입한 이 싸움은 항일 소작쟁의다. 이소선은 이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만주사변(1931)을 계기로 일본의 폭압성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에 항일 소작쟁의에 뛰어든 용감한 농민이다. 아버지가 일제와 지주에게 저항하다가 끌려간 날, 그의 집은 밤중에 불탔다. 이 때문에 김분이는 이소선을 업고 마을을 떠났다. 이소선의 오빠와 언니는 그때 외가에 있었다. 그 뒤 김분이는 재혼해 달성군 다사면 박실마을에 정착했다. 정씨 집성촌인 이곳에서 소녀 이소선은 동네 아이들 중의 유일한 이씨였다. 이로 인해 그는 왕따를 당했다. '데려온 자식'이라는 점도 한몫을 했다. 이소선은 이 차별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제례를 행하는 공간인 마을 재실로 가서 종을 쳐댔다. 그런 뒤 자신도 정씨 성을 갖게 해달라고 마을 어른에게 호소했다. 위 글에 따르면, 정씨 문중은 "무슨 성을 가졌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한 정씨들의 잘못이다"라며 "니가 이씨라고 놀리거나 차별하지 말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줄 것이다"라는 입장을 이씨 소녀에게 전달했다. 그 뒤 이소선은 차별을 받지 않았다. '평등 세상'을 향한 그의 승리였다. 어머니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친 아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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