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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공원에서 독립운동가 환영대회가 성황리에 끝난 것을 목격한 홍봉희는 김의연, 안철수 등과 함께 자치위원회를 조직했다. 서울에서 여운형·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건국준비위원회와 보조를 맞추는 일이었다. 충북자치위원회는 15인이 참여했지만, 활동다운 활동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간판을 내려야만 했다. 해방 후 청주 지역 정가를 우파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지역의 유력자 및 실업가들이 청주읍사무소 2층(현재 청주시의회 청사)에 모여 충청북도 치안유지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은 구연직 제일교회 목사가 맡았다. 이들은 남아 있는 경찰들과 협력하여 관내 치안 유지를 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친일경찰이 청산되지 못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치안유지회는 자치위원회를 흡수·통합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장은 이명구가 맡았다. 그런데 위원장을 맡은 이명구는 일제강점기에 청주 지역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중추원 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2010). 즉, 역사적으로 청산되어야 할 반민족행위자가 건국준비위원회 충북지부 위원장이 되는 희대의 코미디가 연출된 것이다. 청주 지식인과 자치운동의 형성 홍봉희는 건국준비위원회가 건국의 주춧돌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정의 진주를 앞두고 인민위원회로의 개편을 단행했다. 인민위원회는 단일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좌·우를 망라한 민중들의 자치 조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우익이 보이콧을 하면서 좌익들만의 정치조직이 되었다. 충청북도에서는 10개 시군 중에 7개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그중에서 영동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일제시대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의 역사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1945년 11월 20일, 제1차 전국인민위원회의 대표자대회가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열렸다. 충청북도를 대표해서 조준하, 노서호, 장준, 김종우가 참석했고, 청주시를 대표해서 신형석, 홍봉희, 소철영, 이상목 등이 참석했다. 청주시 대표자 중 1인인 홍봉희는 어떤 인물인가? 홍봉희는 석교동 출신으로 일제시기 청주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했고, <조선일보> 청주지국을 운영했다. 해방 후에는 중앙공원 앞에서 '충북석유(설립자 김원근)'라는 석유판매업을 하던 이였다. 그는 불교도이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책 48권을 소지하였다. 당시 청주에서 최고의 사회과학 서적 소장자였다(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 지역 정치사회상, 2009). 1946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인민위원회 충북지부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 조준하 / 부위원장 : 노서호 서기장 : 신형석 / 내정부장 : 김상수 / 노농부장 : 김영식 / 문교부장 : 박인섭 재정부장 : 이상목 / 선전부장 : 노재형 / 보안부장 : 김학영 / 산업부장 : 홍봉희 조준하 인민위원회 충북지부 위원장은 일제시기 옥천군 청산(면)소비조합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옥천군 청산면 자치위원회 조직을 주도했다. 노서호 부위원장은 청원군 부용면 출신으로 후일 민주주의민족전선(아래 민전) 충북지부 위원장을 맡게 된다. 신형석(충북민전 총무부), 김상수(진주 출신으로 영운동에서 풍로공장 운영.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점령기에 청주시 인민위원장 역임), 김영식(충북민전 총무부), 박인섭(청원군 강외면 쌍청리 출신. 충북민전 조직부), 이상목(모충동 출신. 충북민전 조직부), 노재형(청원군 부강 출신. 충북민전 조직부, 민청 청주시책)은 충북인민위원회 주요 간부이자 이후 민청, 민주주의민족전선, 남로당의 주요 간부를 맡게 된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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