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1980년 5월 6일 전남대에서 비상학생총회가 열리고, 8일 이곳에서 조선대·전남대 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14일에는 전남대생 7천여 명이 전투경찰대를 뚫고 교문 밖으로 나가 전남도청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15일에는 시민·청년·교수들이 광주교대·조선대·전남대생 2만 명 이상과 함께 같은 곳에서 집회를 열었다. 16일에도 시민과 학생들이 그곳에 집결했다. 이때는 5만여 명이 운집했다. 5월 초에 광주에서 이런 분위기가 생긴 배경에 관해,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제1권은 "신군부의 정권찬탈 음모 소식이 전달되면서 위기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6일까지 민주화투쟁을 고조시키던 시민과 학생들은 잠시 휴식을 갖기로 결정했다. 위 보고서는 "의사가 충분하게 전달됐으니 정부 측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17일과 18일은 쉬기로 했다"라면서 "만약 정부가 계엄해제와 향후 정치일정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을 경우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기로" 했다고 설명한다. 다시 광주로 돌아온 홍남순 휴식 첫날인 17일, 지역 인사들의 회합에서 강경 대응책이 제시됐다. 하지만 결론은 신중론으로 귀결됐다. 이 지역 민주화운동 지도자 중 하나인 홍남순 변호사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동양정치사상사 연구> 2023년 제22권 제2호에 실린 이희주 서경대 명예교수의 '취영 홍남순의 생애와 사상'은 "취영은 사태의 추이를 보면서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이 회의 뒤에 홍남순은 "예비검속 대상자이니 피하라"는 지인들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그날 밤 9시 42분, 국무회의는 비상계엄을 제주까지 확대하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했다. 11시에는 '반국가세력'을 체포하기 위한 예비검속이 전국적으로 개시됐다. 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국 계엄을 통해 계엄사와 신군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행정부를 확실히 장악하며, 사실상 새로운 계엄을 선포하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 사회통제를 강화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일이었다. 68세의 홍남순은 계엄 확대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다. "섬뜩한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듯한 느낌"(위 논문)이 그의 가슴에서 일었다. 이 밤이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지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비검속의 예봉을 잠시나마 피하자는 마음으로 광주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고 위 논문은 기술한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선 전남 화순 출신의 이 민주화운동가는 서울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광주에서 유혈 진압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전체 내용보기
Go to News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