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해방 후 청주 인구는 급증했다. 1945년 말 청주 인구는 확인되지 않지만 전국적 추세와 더불어 청주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청년들은 일제의 징용과 징병 정책으로 조선 땅을 떠나야 했다. 또한 구한말 시절부터 땅 없는 농민, 굶어 죽기 직전의 조선인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상당수의 해외동포들이 귀국했다. 전국에서 전재동포 구제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군정에서도 전재동포 관련 예산을 편성했다. <서울신문>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7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재동포의 구제책은 그들 대부분이 조선의 중견근로자이며 금후의 전국 제 산업부흥에 핵심이 될 중추인물인만큼 당면한 가장 중대 문제임에 비추어 군정청 후생국에서는 각종 대책을 연구하는 중이다. 즉, 제일보로 금 12월 10일 1500만 원의 전재자 구제 비용을 지출하여 38도 이남 각지에 배분하였는데..." - <서울신문>, 1945.12.23. 1500만 원 예산 중 충북에 할당된 금액은 105만 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예산과 민간 차원의 '전재동포 구제후원회' 활동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근본적 대책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런 이유로 결국은 이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남방귀환동포충북린(麟)회가 결성된 것이다. '우리는 남방으로부터 귀환하였으나 의식주의 곤란이 막심하므로 상호 구조하여 근로함으로써 건국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함'을 목적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명칭을 봤을 때 일본에서 귀환한 이들의 모임이었을 것이다. 회장 이동환, 부회장 최현수, 총무 신연우였다. 회원은 총 694명이었다. 회원 110명에 가족 584명을 합친 것이다. 전체 대상자(충청북도 14만 5000명) 중 회원은 극히 일부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구체적 활동이 밝혀진 바는 없다. 사실 전재동포 구제후원회 역시 일본이나 만주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청주역으로 오면 의류나 귀향 여비를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즉 취업 알선이나 주택 대책은 꿈도 꾸지 못할 문제였다. '남방귀환동포충북린(麟)회'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 청주읍근로동원자동맹이다. 이 단체는 '본 동맹은 건국 달성 촉진과 전재동포를 조조구호(助助救護)함'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위원장은 정영준이었고 회원은 64명이었다. 전재동포 관련 모임은 또 있었다. '귀향전재동포로서 조직하여 토건사업에 각인의 귀중한 기능과 노력을 제공하여 생활을 보전함과 동시에 건축 사업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청주토건공사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이해당사자들의 상호부조 모임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지닌 회사였다. 대표이사는 구원청이었고 박근형, 박태진, 류근형, 백상기, 강석윤, 황인수가 이사였다. 회원은 642명이었다. 위와 같은 단체들이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취업과 경제적 자립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 산업이 군수산업으로 편재되어 산업 가동률이 저조했던 점을 생각하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주의 3인방 해방 후 청주의 3인방이 있었다. 황기봉은 행사나 집회 때마다 사회를 도맡아 진행했으며, 화려한 의상과 몸짓으로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포목점을 운영한 이만수는 각종 씨름대회를 무심천 광장에서 주관했다. 전국의 유명한 선수들을 초청해 씨름대회를 열었다. 1952년 초대 지방선거에서 도의원에 당선된 전명식은 달리기 실력이 탁월했다. 육상대회가 열리는 날은 전명식의 생일날이었다고 한다. 그는 단거리부터 마라톤까지 육상경기의 귀재였으며 축구심판도 보았다. 청주의 3인방 중 황기봉은 청주약국 네거리에서 과자점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부터 남문로에서 청수과자점을 운영했는데, 그는 청주의 유명 인사였다. 그는 청주에서 행사나 집회가 열리면 그날은 '황기봉의 생일'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최동찬의 증언이다. 전체 내용보기
Go to News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