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지난 9일, 6·15경기중부평화연대(집행위원장 신영배) 일행과 함께 남영동을 찾았다. 2025년 6월 항쟁 제38주년을 기념하여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개관했다. 기념관은 남영역에 내려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다. 참혹한 고문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 1976년 10월 남영역 인근 갈월동 98번지에 지상 5층 규모의 검은색 벽돌 건물이 들어섰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간첩을 취조한다는 명분으로 내무부 장관 김치열이 발주하고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그러나 대공업무 외에도 독재 정권에 맞서는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해 잔인한 고문과 폭행을 가하는 인권유린의 장소로 쓰였다. 인근에 공장과 주택이 있었으나 "○○해양연구소"로 위장 간판을 달고 있었다. 푸른 테니스 코트에서 종종 경기가 벌어지는 이곳을 주변 사람들은 참혹한 폭행이 자행되는 곳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현재 마당에 대공분실 후문의 철문이 전시되어 있다. 일행은 옛 대공분실 건물 뒤쪽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옆에 1970년대 담장이 남아있다. 오래된 시멘트 벽 위에 가시 철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 기둥에 우리나라 헌법이 적혀 있었다. 그중 아래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건 이곳에서 자행된 일들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 헌법 제 12조 2항 벽을 돌자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작은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성인 서너 명이 겨우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았고 옆에 나선형 철제 계단이 있었다. 건물 곳곳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더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게 할 것인지 치밀하게 연구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 첫 번째가 이 나선형 계단이다. 계단의 폭은 매우 좁아 추락의 위험이 있어 보였고 회전 반경도 작았다. 눈을 가린 피의자를 위층으로 끌고 올라갈 때 위치나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구조라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도착했다. 이곳은 특수조사실로 '수괴급'이라 불리던 피의자를 조사했던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고문 기구들이 놓여 있었고 영상을 통해 고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마주하게 된 기구는 칠성판이었다. 칠성판은 시신을 받치기 위해 관바닥에 까는 나무판으로 이곳에 사람을 묶어 놓고 구타했다고 한다. 멍석말이로 사람을 때리고 바비큐 구이처럼 책상 사이에 나무를 걸쳐놓고 사람을 매달아 놓는 도구도 있었다. 당시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이야기는 고 김근태 의원의 증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으로 육체를 파괴하고 정신도 짓밟으려 했던 그는 사악한 각종 방법으로 민주 투사들을 고문했다. 밖으로 나오니 이근안의 다른 피해자들의 진술이 적힌 책들이 있었다. 그들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고문의 상처를 책으로 펴내 부조리한 권력의 민낯을 세상에 알렸다. 특수고문실 옆에 전망 좋은 테라스가 있었고 소파가 길게 놓여 있었다. 국가의 안보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국민을 억압하고 아무 죄책감 없이 고문을 자행했던 끔찍한 상황이 그려졌다. 권력을 추종하고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 안락한 시간을 누린 자들의 행태가 역겨웠다. 고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죽음을 맞이한 곳 5층에는 15개의 조사실(건축 당시 총 18개의 조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긴 복도를 따라 서로 마주 보지 않게 지그재그로 조사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벽이 두껍고 조사실마다 폭 30cm의 수직창이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다. 창틀의 너비를 빼면 실제 빛이 들어오는 폭은 약 20c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창의 폭을 좁게 한 이유는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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