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or
33년 전 죽은 동생, <br>한국 '5·18 테이프'에<br> 살아 있다니 | Collector 는 5·18기념재단이 보관한 힌츠페터의 미공개 테이프에서 46년 전 팀의 인터뷰를 발견했고 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Roxanne Warnberg Wilson, 72)을 만나러 지난 겨울 끝자락에 미국 미네소타로 향했다. 5·18 당시 촬영된 누군가의 인터뷰 영상은 그동안 볼 수 없는 기록물이었다. 열흘 간의 항쟁을 목격한 팀은 시민들을 구타하는 계엄군을 말리다 곤봉에 얻어맞기도 하고, 총칼을 찬 군인들 사이로 부상자들을 병원에 이송하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오라는 주한 미대사관의 지시를 거부하고, 유창한 한국어로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도왔으며, "5월 18일에 광주에 있었다"며 힌츠페터가 제안한 인터뷰에도 기꺼이 응한 그였다. 1987년 외국인 최초로 5·18을 폭도의 소행이 아닌 시민의 항쟁으로 정의한 논문을 발표한 팀은 6년 뒤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말 처음 힌츠페터 테이프에서 팀의 인터뷰 영상을 발견했을 때, 취재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었다. 팀과 함께 5·18을 목격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에게 그의 누나 록산이 미네소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처를 받았다. 영상통화로 만난 록산은 팀과 같은 갈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도 비슷했다. 의사를 꿈꾸며 광주에서 의료 봉사를 했던 팀처럼, 록산도 50년 넘게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매년 동생의 기일이면 록산은 소셜미디어에 그가 46년 전 광주에서 들것을 든 모습을 올린다고 했다. 팀을 더 알고 싶다는 취재진의 목표는 그때부터 바뀌었다. 스물다섯 청년 팀의 육성을 팀을 꼭 닮은 그의 가족에게 뒤늦게라도 직접 들려주고 싶었다. 지난 2월 28일, 12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미네소타는 영하 15도에 육박했다. 도로 곳곳에는 직전 내린 눈이 얼음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지난 1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를 동원한 국가폭력과 이에 대응한 대규모 저항의 여파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3월 1일과 4일 두 차례 록산을 인터뷰했다. 두 번째 만남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 사이 달라진 점은, 록산이 힌츠페터 영상 속 동생의 모습과 광주의 참상을 눈으로 봤다는 것뿐이었다. 첫날 인터뷰 중 영상을 본 록산은 "정말 끔찍하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날 밤 취재진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이 영상을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라고 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잔혹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니, 정말 충격적입니다. 피해자들, 목격자들, 심지어 군인들에게도 참혹한 마음이 듭니다. 영상을 직접 보니, 동생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용감하게 나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마치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a gift and a burden to carry) 입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우리가 맞서야 할 일들이 있고, 함께 지켜야 할 가치들도 있으니까요." 전체 내용보기"> 는 5·18기념재단이 보관한 힌츠페터의 미공개 테이프에서 46년 전 팀의 인터뷰를 발견했고 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Roxanne Warnberg Wilson, 72)을 만나러 지난 겨울 끝자락에 미국 미네소타로 향했다. 5·18 당시 촬영된 누군가의 인터뷰 영상은 그동안 볼 수 없는 기록물이었다. 열흘 간의 항쟁을 목격한 팀은 시민들을 구타하는 계엄군을 말리다 곤봉에 얻어맞기도 하고, 총칼을 찬 군인들 사이로 부상자들을 병원에 이송하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오라는 주한 미대사관의 지시를 거부하고, 유창한 한국어로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도왔으며, "5월 18일에 광주에 있었다"며 힌츠페터가 제안한 인터뷰에도 기꺼이 응한 그였다. 1987년 외국인 최초로 5·18을 폭도의 소행이 아닌 시민의 항쟁으로 정의한 논문을 발표한 팀은 6년 뒤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말 처음 힌츠페터 테이프에서 팀의 인터뷰 영상을 발견했을 때, 취재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었다. 팀과 함께 5·18을 목격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에게 그의 누나 록산이 미네소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처를 받았다. 영상통화로 만난 록산은 팀과 같은 갈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도 비슷했다. 의사를 꿈꾸며 광주에서 의료 봉사를 했던 팀처럼, 록산도 50년 넘게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매년 동생의 기일이면 록산은 소셜미디어에 그가 46년 전 광주에서 들것을 든 모습을 올린다고 했다. 팀을 더 알고 싶다는 취재진의 목표는 그때부터 바뀌었다. 스물다섯 청년 팀의 육성을 팀을 꼭 닮은 그의 가족에게 뒤늦게라도 직접 들려주고 싶었다. 지난 2월 28일, 12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미네소타는 영하 15도에 육박했다. 도로 곳곳에는 직전 내린 눈이 얼음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지난 1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를 동원한 국가폭력과 이에 대응한 대규모 저항의 여파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3월 1일과 4일 두 차례 록산을 인터뷰했다. 두 번째 만남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 사이 달라진 점은, 록산이 힌츠페터 영상 속 동생의 모습과 광주의 참상을 눈으로 봤다는 것뿐이었다. 첫날 인터뷰 중 영상을 본 록산은 "정말 끔찍하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날 밤 취재진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이 영상을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라고 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잔혹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니, 정말 충격적입니다. 피해자들, 목격자들, 심지어 군인들에게도 참혹한 마음이 듭니다. 영상을 직접 보니, 동생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용감하게 나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마치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a gift and a burden to carry) 입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우리가 맞서야 할 일들이 있고, 함께 지켜야 할 가치들도 있으니까요." 전체 내용보기"> 는 5·18기념재단이 보관한 힌츠페터의 미공개 테이프에서 46년 전 팀의 인터뷰를 발견했고 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Roxanne Warnberg Wilson, 72)을 만나러 지난 겨울 끝자락에 미국 미네소타로 향했다. 5·18 당시 촬영된 누군가의 인터뷰 영상은 그동안 볼 수 없는 기록물이었다. 열흘 간의 항쟁을 목격한 팀은 시민들을 구타하는 계엄군을 말리다 곤봉에 얻어맞기도 하고, 총칼을 찬 군인들 사이로 부상자들을 병원에 이송하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오라는 주한 미대사관의 지시를 거부하고, 유창한 한국어로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도왔으며, "5월 18일에 광주에 있었다"며 힌츠페터가 제안한 인터뷰에도 기꺼이 응한 그였다. 1987년 외국인 최초로 5·18을 폭도의 소행이 아닌 시민의 항쟁으로 정의한 논문을 발표한 팀은 6년 뒤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말 처음 힌츠페터 테이프에서 팀의 인터뷰 영상을 발견했을 때, 취재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었다. 팀과 함께 5·18을 목격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에게 그의 누나 록산이 미네소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처를 받았다. 영상통화로 만난 록산은 팀과 같은 갈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도 비슷했다. 의사를 꿈꾸며 광주에서 의료 봉사를 했던 팀처럼, 록산도 50년 넘게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매년 동생의 기일이면 록산은 소셜미디어에 그가 46년 전 광주에서 들것을 든 모습을 올린다고 했다. 팀을 더 알고 싶다는 취재진의 목표는 그때부터 바뀌었다. 스물다섯 청년 팀의 육성을 팀을 꼭 닮은 그의 가족에게 뒤늦게라도 직접 들려주고 싶었다. 지난 2월 28일, 12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미네소타는 영하 15도에 육박했다. 도로 곳곳에는 직전 내린 눈이 얼음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지난 1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를 동원한 국가폭력과 이에 대응한 대규모 저항의 여파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3월 1일과 4일 두 차례 록산을 인터뷰했다. 두 번째 만남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 사이 달라진 점은, 록산이 힌츠페터 영상 속 동생의 모습과 광주의 참상을 눈으로 봤다는 것뿐이었다. 첫날 인터뷰 중 영상을 본 록산은 "정말 끔찍하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날 밤 취재진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이 영상을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라고 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잔혹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니, 정말 충격적입니다. 피해자들, 목격자들, 심지어 군인들에게도 참혹한 마음이 듭니다. 영상을 직접 보니, 동생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용감하게 나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마치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a gift and a burden to carry) 입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우리가 맞서야 할 일들이 있고, 함께 지켜야 할 가치들도 있으니까요." 전체 내용보기">
33년 전 죽은 동생, <br>한국 '5·18 테이프'에<br> 살아 있다니
오마이뉴스

33년 전 죽은 동생,
한국 '5·18 테이프'에
살아 있다니

33년 전 지병으로 죽은 동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다. 노트북 화면 속 동생은 떨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2분 30초 동안 머나먼 나라의 학살을 증언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광주" 한복판에서 동생은 못 보던 선글라스를 쓰고 "군인들이 잔혹하게 때려 사람들의 머리가 찢어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고 연신 목소리를 높였다. 고 위르겐 힌츠페터(2016년 작고)가 촬영·편집한 총 30여 분의 이 영상은 동생의 모습 외에도 그의 말을 증명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사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동생은 죽기 전까지 그날의 광주를 이야기했다. 다만 동생이 목격한 참상을 두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50년 넘게 간호사로 일했고 인간의 신체에 익숙했지만, 잔혹한 폭력의 잔상은 누나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왜 그토록 동생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고 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그의 미소 닮은 누나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1978년부터 광주에 머물다 5·18민주화운동을 한복판에서 경험한 고 팀 원버그(Tim Warnberg, 5·18 당시 25세). <오마이뉴스>는 5·18기념재단이 보관한 힌츠페터의 미공개 테이프에서 46년 전 팀의 인터뷰를 발견했고 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Roxanne Warnberg Wilson, 72)을 만나러 지난 겨울 끝자락에 미국 미네소타로 향했다. 5·18 당시 촬영된 누군가의 인터뷰 영상은 그동안 볼 수 없는 기록물이었다. 열흘 간의 항쟁을 목격한 팀은 시민들을 구타하는 계엄군을 말리다 곤봉에 얻어맞기도 하고, 총칼을 찬 군인들 사이로 부상자들을 병원에 이송하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오라는 주한 미대사관의 지시를 거부하고, 유창한 한국어로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도왔으며, "5월 18일에 광주에 있었다"며 힌츠페터가 제안한 인터뷰에도 기꺼이 응한 그였다. 1987년 외국인 최초로 5·18을 폭도의 소행이 아닌 시민의 항쟁으로 정의한 논문을 발표한 팀은 6년 뒤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말 처음 힌츠페터 테이프에서 팀의 인터뷰 영상을 발견했을 때, 취재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었다. 팀과 함께 5·18을 목격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에게 그의 누나 록산이 미네소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처를 받았다. 영상통화로 만난 록산은 팀과 같은 갈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도 비슷했다. 의사를 꿈꾸며 광주에서 의료 봉사를 했던 팀처럼, 록산도 50년 넘게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매년 동생의 기일이면 록산은 소셜미디어에 그가 46년 전 광주에서 들것을 든 모습을 올린다고 했다. 팀을 더 알고 싶다는 취재진의 목표는 그때부터 바뀌었다. 스물다섯 청년 팀의 육성을 팀을 꼭 닮은 그의 가족에게 뒤늦게라도 직접 들려주고 싶었다. 지난 2월 28일, 12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미네소타는 영하 15도에 육박했다. 도로 곳곳에는 직전 내린 눈이 얼음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지난 1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를 동원한 국가폭력과 이에 대응한 대규모 저항의 여파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3월 1일과 4일 두 차례 록산을 인터뷰했다. 두 번째 만남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 사이 달라진 점은, 록산이 힌츠페터 영상 속 동생의 모습과 광주의 참상을 눈으로 봤다는 것뿐이었다. 첫날 인터뷰 중 영상을 본 록산은 "정말 끔찍하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날 밤 취재진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이 영상을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라고 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잔혹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니, 정말 충격적입니다. 피해자들, 목격자들, 심지어 군인들에게도 참혹한 마음이 듭니다. 영상을 직접 보니, 동생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용감하게 나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마치 선물이자 무거운 과제(a gift and a burden to carry) 입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우리가 맞서야 할 일들이 있고, 함께 지켜야 할 가치들도 있으니까요."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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