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or
악은 괴물처럼 오지 않는다, 때로 "학생 보호"라는 이름으로 온다 | Collector
악은 괴물처럼 오지 않는다, 때로
오마이뉴스

악은 괴물처럼 오지 않는다, 때로 "학생 보호"라는 이름으로 온다

5월, 스승의 날이 되면 우리는 교사의 헌신을 말한다. 그러나 올해 학교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낭만적이지 않다. 현장체험학습을 가야 하는가, 가지 말아야 하는가. 사고가 나면 교사 개인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최근 교육부가 현장체험학습 중 안전사고와 관련해 교사 책임 부담을 줄이고 학교 현장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도, 이 문제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을 흔드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교사는 학생을 데리고 학교 밖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도 불안하다.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경험을 주고 싶지만, 예측할 수 없는 사고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두렵다. 그래서 교육은 점점 체험보다 통제, 관계보다 절차, 성장보다 안전관리의 언어로 이동한다. 이것은 교사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다. 지금 학교가 교사에게 요구하는 역할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악은 늘 괴물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보며 말한 "악의 평범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악은 잔혹한 의도를 가진 특별한 인간에게서만 생기지 않는다. 자기 판단을 멈추고, 명령과 절차와 역할 뒤에 숨을 때,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 거대한 악의 수행자가 된다. 칼 야스퍼스도 같은 문제를 다른 언어로 말했다. 악을 신화화하지 말라. 악을 괴물의 것으로 만들지 말라. 그리고 무관심과 순응도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보라. 이 말은 오늘 한국 교육현장을 볼 때 불편하게 되살아난다. 점점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학생의 삶 우리는 학교가 창의적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혁신적 사고, 자기주도성, 미래형 천재를 말한다. 그러나 실제 학교 안에서 학생의 삶은 점점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학생의 혼란은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정서 문제로 분류된다. 학생의 고통은 삶의 질문이 아니라 정신건강 위험으로 기록된다. 학생의 방황은 존재의 흔들림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신호가 된다.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의 가장 큰 문제는 검사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학생의 삶을 교육의 문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위험관리의 문제로 볼 것인가. 물론 학교는 실제 위기 학생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자살 위험, 자해, 폭력, 심각한 고립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한다. 현장체험학습에서도 학생 안전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문제는 이 보호의 언어가 학교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다. 학생 보호라는 명분이 학생 관리의 체계로 바뀌는 순간, 학교는 더 이상 학생의 삶을 읽지 않는다. 학생의 위험도를 측정한다. 학생이 "학교가 숨 막혀요"라고 말할 때, 학교는 묻지 않는다.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었기에 지금 숨이 막히는가?" 대신 체크리스트를 꺼낸다. 학생이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때, 학교는 묻지 않는다. "네 삶에서 어떤 의미가 무너졌는가?" 대신 자살 위험 문항을 확인한다. 학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관계를 피할 때, 학교는 묻지 않는다. "이 아이는 어떤 기준과 믿음의 충돌 속에 있는가?" 대신 ADHD, 우울, 충동성, 공격성, 고위험군의 언어로 학생을 번역한다. 그 순간 학생은 자기 삶을 말할 기회를 잃는다. 대신 자신이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인지 설명받는다. 전체 내용보기

Go to News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