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일본이 인력과 물질만 착취해 간 것은 아니다. 일제는 식민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들어갈 지식과 정보의 흐름도 차단했다. 식민지 시기의 정규대학은 경성제국대학뿐이었다. 지금의 이화여대·고려대·연세대로 계승될 이화여전·보성전문·연희전문이 있었지만, 이 학교들은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였다. 일제가 인문교육을 제한하고 주로 기술교육만 허용했다고들 하지만, 기술교육에서도 민족 차별이 많았다. 전문가 수준의 기술교육이나 과학교육은 한국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에 노벨화학상 수상이 가능했던 세계적 학자 중 하나가 고 이태규(1902~1992) 카이스트 명예교수다. 대한화학회가 펴낸 이태규 전기인 <나는 과학자이다>에 따르면, 중등학교인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는 알파벳 글자가 12개보다 많은 현실 앞에서 당황했다. 그가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접했던 알파벳은 ABCDEFGHI와 XYZ뿐이었다. 그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의 물리 교사가 첫 수업 때 인트로덕션(introduction)이라는 단어를 칠판에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무슨 철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중등학교만 나온 사람들은 독학을 하지 않은 한은 외국어로 적힌 과학 지식을 접할 수 없었던 식민지 한국의 교육 현실을 반영하는 장면이다. <초등과학교육> 2022년 제41권 제2호에 실린 이면우 춘천교육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교사 윤재천이 본 조선의 초등과학교육'은 구한말 때인 1895년 상황을 언급하면서 "이 시기에 3가지 종류의 이과 교과서가 출판되어 조선 나름의 근대 과학교육이 실천"됐다고 설명한다. 이런 흐름이 일제 강점으로 단절돼 한국의 과학교육이 세계 수준과 동떨어지게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화학공학을 위해 해방 직후부터 분투한 학자 중 하나가 고 이재성(1924~2016) 서울대 교수다. 이태규가 이론 분야에서 두드러졌다면, 이재성은 산업 실무 쪽에서 두각을 보였다. 새로운 화학 지식을 한국에 보급 1924년 4월 27일 지금의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출생한 이재성은 만주제일신경중학교-여순고등학교를 거쳐 19세 때인 1943년에 도쿄제국대학 응용화학과에 입학했다가 2년 뒤 중단하고 귀국했다. 이로부터 5개월 뒤 8·15 광복이 있었고, 그해 12월 경성대학 응용화학과에 편입해 이듬해 7월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서울대 교수요원이 된 그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을 며칠 앞두고 컬럼비아대학 화학공학과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뒤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고국의 학계에 강한 인상을 주는 행보를 걸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발행한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백과> 이재성 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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