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1980년 5월,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된 섬이었다. 외부로 통하는 길은 군인들에 의해 봉쇄되었고, 도시의 전기와 전화는 끊겼으며, 밤마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당시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활동했다는 사람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22일, 전북 순창군 팔덕면 광암마을로 향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이곳에서 기자는 광주 항쟁 당시 그 참혹한 광경을 지켜봤던 사람을 무려 세 명이나 만나게 됐다. 그 주인공인 성향자, 이경범, 임종호씨를 만나 대화를 나눠봤다. 성향자·이경범씨는 순창군 팔덕면 광암마을 출신이며, 임종호씨는 순창군 구림면 출신으로 1970년부터 순창군 팔덕면에 정착해 살고 있다. 이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겪었던 각자의 이야기를 기자에게 털어놨다. 다음 내용은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한 것이다. 오후 7시 되면 암흑 도시, 광천초 옥상 가득 채운 군인들 성향자씨는 1979년생인 돌잡이 딸을 품에 안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1979년에 낳은 딸아이가 겨우 한 살이었을 때예요. 오후 7시가 되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집 안의 불도 모두 끄라고 했습니다. 전기도, 물도, 텔레비전도 다 끊어버렸어요. 아기는 어두우니까 답답해서 울어대는데 참 가슴이 미어지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때 광주 광천초등학교 바로 앞에 살았는데, 학교 옥상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꽉 차 있었습니다. 집에서 그 모습이 너무나 잘 보였어요. 밤만 되면 바깥에 나오는 사람을 무조건 총으로 쏴버리던 무서운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올해로 여든 살인데, 그게 벌써 46년 전이네요." 도시가 봉쇄되면서 가장 먼저 찾아온 고통은 식량 부족이었다. 가게들이 일제히 문을 닫으면서 쌀이 떨어진 이들은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가게가 문을 안 여니까 쌀이 없는 사람들은 굶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골에 계신 친척들이 걸어와서 쌀이나 채소를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도청 앞 시신들과 계엄군의 잔인함 이경범씨와 성향자씨는 당시 계엄군의 진압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다고 입을 모았다. 남편과 이웃들이 매일 자전거를 타고 전남도청 앞에 가보면 시신들이 줄지어 눕혀져 있었다. "우리 아저씨(남편)가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도청에 갔어요. 가보면 (군인들이) 죽은 사람들을 도청 앞에 주르륵 깔아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냥 길을 지나가다가 군인들한테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우리 동네에서도 여상(여자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 하나가 도청에 구경하러 갔다가 죽었는데, 소문도 안 나게 감쪽같이 치워버리더군요. 사람이 죽어도 초상을 치를 수 있는 장례식장도, 가게도 없던 때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경범씨는 군용차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울부짖던 한 여성의 목소리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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