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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떻게 살고 있냐' 묻는 것 같은 김남주 시인의 시비 | Collector
'지금 어떻게 살고 있냐' 묻는 것 같은 김남주 시인의 시비
오마이뉴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냐' 묻는 것 같은 김남주 시인의 시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김남주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일부분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노래로도 만들어져 많이 불렸다. 노랫말을 흥얼거리다 보면 차갑던 마음이 금세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다. 민족문학의 큰별로 우리 가슴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시인 김남주다. 김남주를 그저 '시인'으로만 부르기엔 왠지 낯설다. 시인 앞에 단어를 하나 더해야 어색하지 않다. 민족시인, 혁명시인, 전사시인 등. 그의 시는 횃불이었다. 낫이고, 칼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 현장에서 그의 시는 투쟁 구호였다. 지난 5월 14일과 18일, 흙에서 태어나 강철이 된 김남주(1946⁓1994)의 태 자리를 찾았다. '땅끝'으로 가는 길,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鳳鶴里)다. 어린 김남주가 감수성을 키운 곳이다. 그가 땅을 일구는 농군의 거친 손을 처음 대한 곳이기도 하다. 지명처럼 봉황과 학이 살 만큼 평화로운 마을이다. 한낮의 마을이 고요하다. 모내기를 끝낸 들녘이 푸르름을 더해준다. 어린 김남주도 봤을 풍경이다. 논물에 반영돼 비치는 마을과 산세도 아름답다. 어쩌다 오가는 트랙터와 용달차가 마을의 고요를 깨운다. 김남주 생가가 말끔하다. 방치된 생가를 복원하고 단장한 건 20여 년 전이다. 지금은 '김남주 문학공원'으로 이름 붙었다. 생가 처마에 '민족시인 김남주 생가'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굵고 따뜻한 글씨체에서 고 신영복의 작품임을 직감한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도 현판으로 걸려 있다. 마당 한쪽에 김남주 흉상이 서 있다. 김기범 조각가의 작품이다. 안경을 낀 흉상은 그가 감옥에서 그토록 그리워했을 고향의 푸른 하늘과 햇살, 바람을 맞고 서 있다. 그가 감옥에서 생활한 독방도 한쪽에 재현해 놓았다. 김남주는 삼산면과 화산면 경계에 있던 삼화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일고에 합격했다. 김남주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1964년은 박정희가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을 추진하던 때였다. 학생들의 소극적인 대응에 실망한 그는 2학기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획일적인 입시 위주 교육도 마뜩잖아 스스로 학교를 그만뒀다. 검정고시를 거쳐 1969년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김남주는 3선개헌과 교련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시월유신은 김남주의 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 이강과 함께 유신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지하신문 '함성'을 만들어 뿌리다가 첫 옥살이를 했다.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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