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음력 사월 초파일, 불기 2570년의 부처님오신날이다. 하늘엔 낮 동안 이른 여름의 기운이 감돌고, 대지는 온통 싱그러운 초록으로 야생이 일렁이고 있다. 2500여 년 전, 오늘날 네팔의 룸비니 지천에서 태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그가 세상에 던진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은 긴 시간을 거슬러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도 여전히 유효한 위로로 흐른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마음의 정갈함과 신록의 푸르름을 찾아 나섰다. 발길이 향한 곳은 서울 은평구 북한산 자락의 천년고찰 진관사였다. 현대의 세련됨을 비껴 가지 않은 은평한옥마을의 고풍스러운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연등들이 산사의 고즈넉한 품으로 나를 마중하는 듯했다. 알록달록한 연등이 가까이 보이는 신록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이 슬쩍 지나갈 때마다 깃털처럼 흔들리는 연등들. 저마다의 빛깔 속에는 누군가의 애틋한 가족에 대한 안녕이, 또 간절한 삶의 기도가 매달려 있는 듯싶다. 진관사 일주문 근처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귀를 두드린 것은 청량한 계곡물 소리였다. 삼각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이 물줄기는 사시사철 마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돌 사이를 유려하게 휘감으며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마치 속세의 묵은 때를 씻어내듯 절집의 정갈함을 더해준다. 맑은 정취의 덕분일까.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교 신도들 뿐만 아니라, 지친 마음을 누이고자 하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내는 발 디딜 틈 없이 찾아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90년의 침묵을 깨고 피어난 보물 태극기 백초월길, 백초월 선사와 태극기에 대한 안내문 하나가 눈길을 끈다. 불교의 깊은 자비를 수행하는 절집에서 마주한 태극기라는 단어는 신선하면서도 의아함을 자아냈다. 백초월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찰의 경내로 들어서는 것을 넘어,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아프고도 뜨거웠던 독립운동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단아한 미를 뽐내는 대웅전 앞마당은 형형색색의 연등으로 가득 찼다. 마치 거대한 꽃밭을 연상케 했다. 각자의 염원이 담긴 연등들이 오월의 투명한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주변에는 오랜 세월을 버텨온 노송들이 묵묵히 절을 지키고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의 굽은 가지와 거친 껍질에서는 모진 풍파를 견뎌낸 세월의 깊이와 장엄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나는 걸음을 재촉해 진관사 태극기의 비밀이 숨겨져 있던 칠성각으로 향했다. 지난 2009년, 낡은 칠성각을 해체하여 복원하는 과정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불단을 뜯어내고 벽체 깊숙한 곳을 살피던 중, 빛바랜 보따리 하나가 발견된 것이다. 보따리를 조심스레 풀자, 오래 숨죽였던 역사의 숨결이 9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심에는 세월의 때와 불에 그슬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태극기 한 점이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태극기는 새 천에 그린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엄혹한 감시를 피해, 붉은 동그라미가 선명한 일장기 위에 검은 먹으로 태극과 4괘를 정성스레 덧칠해 만든 것이었다. 일장기 위에 조심스레 태극을 덧그렸을 누군가의 간절함이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거친 질감 위로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해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유일무이한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을 인정받아, 진관사 태극기는 등록문화재를 넘어 대한민국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사찰에서 발견된 태극기 중 최초의 보물 지정이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불교계의 외침이 국가적 역사의 정수로 공인 받은 순간이었다. 더욱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태극기 안에 소중히 싸여 있던 독립운동 사료들이었다. 태극기는 그냥 묻혀 있던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발간되던 항일 언론 매체들을 품고 있는 '보자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보따리 안에서는 1919년 6월부터 12월 사이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발행한 <독립신문>, <신대한신문>,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포고문과 경고문 등 무려 6종 20점에 달하는 귀중한 사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검열의 칼날을 피해 독립의 소식을 전하던 종이들이 마침내 이곳 비밀 거점에 모여, 태극기의 품 안에서 90년 동안 숨죽여 있었던 것이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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